엄마 손잡고 유치원에 다녀오던 4살 재은이는 집 앞에서 '한글 선생님' 윤미애(43)씨를 보자 까르르 웃었다. 윤씨가 "재은이 한글 공부 많이 했어요?" 하고 묻자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은이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작은 소반(小盤) 위에 재은이가 배우는 한글책과 단어장이 펼쳐져 있다. 벽에는 한글 단어가 빼곡하게 적힌 재은이 키만한 종이표가 붙어 있다. 모두 윤씨가 준 것이다. 윤씨가 "오늘은 채소에 대해서 공부해 볼까요"하며 새 책을 꺼냈다. 재은이 엄마 팜피팀(32)씨가 딸 곁으로 왔다. "나도 딸이랑 같이 배워요."

재은이네는 아빠가 한국 출신, 엄마는 베트남 출신인 다문화 가정이다. 웅진씽크빅 학습지 교사 윤씨는 지난해 12월부터 1주일에 한 번 경기도 시흥 재은이네 집에 들러 무료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웅진씽크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다문화 가정에 한글 교육을 가르치는 '희망 한글' 활동이다.

웅진씽크빅‘한글 선생님’윤미애(사진 오른쪽)씨가 재은이와 재은이 어머니 팜피팀씨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5년 전 한국에 온 팜피팀씨는 이수연(49)씨와 결혼해 재은이를 낳았다. 재은이는 생후 18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에 다녔지만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재은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의 한국어가 서툴렀기 때문이다. 팜피팀씨는 "엄마도 한글 몰라서 (가르치는 거) 못해요"라고 했다. "저 발음 아직 몰라요. 단어도 많이 못해요. 딸에게 동화책 읽어줬어요. ㄱ, ㄴ, ㄷ, ㄹ도 쓰게 했어요. 재은이 금방 싫증 냈어요." 재은이 아빠 이씨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느라 밤낮으로 바빴다. 이씨는 "재은이가 엄마의 발음과 억양을 그대로 따라 해서 걱정이 많이 됐다"고 했다.

웅진씽크빅은 작년 9월부터 경기도 내 다문화가정 아이 중 만 3~6세 취학 전 아동과 한글을 깨치지 못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습지원에 나섰다. 학습지 교사가 1주일에 한 번 다문화가정을 방문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재도 지원한다. 웅진씽크빅 최봉수 대표는 "우리나라 다문화 가정이 16만 7000여 가구에 이르고, 취학 전 아동은 6만 1000여명이나 된다"며 "이 아동들이 한글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데 이것이 학습 부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듣고 우리 회사의 장점을 살려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현재 경기도 내 다문화 가정 아동 962명이 웅진씽크빅을 통해 무료로 한글 교육을 받고 있다. 참여 교사는 480여명에 이른다.

윤씨는 다문화 가정 아이 3명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처음 가르칠 때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 수준이나 발음, 문장력이 또래 아이들보다 부족했다"고 했다. 윤씨는 가르치는 시간을 평소보다 2배 정도로 늘리고, 교재도 따로 만들어 갖고 갔다. 다문화 가정 엄마들의 학습 상담도 맡았다.

윤씨가 재은이 앞에 버섯, 옥수수, 고구마, 배추가 그려진 책을 펼쳤다. "이 중에 뭐가 제일 좋아?"하고 묻자 재은이가 "옥수수!"하며 옥수수 그림을 콕 찍었다. 윤씨가 한글로 '옥수수'라고 적힌 손가락 마디만한 스티커를 꺼내 빙빙 돌리자 재은이가 냉큼 뺏어서는 옥수수 그림 옆에 붙였다. '감자' '무' '오이' 단어도 똑같이 했다.

팜피팀씨는 "다섯달 만에 딸이 한글을 너무 좋아하고 '왜 선생님 안 와?'라는 말을 자주 해요. 저도 공부 많이 했어요"라고 했다. 재은이 아빠 이씨는 "딸의 한글 발음과 억양이 정확해져서 정말 안심이 된다"고 했다. 중국 출신 진홍(35)씨 딸 민정이(4)도 윤씨가 가르친다. 진홍씨는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던 딸이 어느 날 '엄마, 아빠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더니 공책에 쓰는 걸 보고 정말 대견했다"며 "이제는 민정이가 한글을 줄줄 읽는데 모두 윤 선생님 덕분"이라고 했다.

윤씨는 "하루에 7~8시간씩 일하느라 힘든 건 사실이지만 다문화 가정 아이들 때문에 오히려 힘이 난다"고 했다. "재은이와 민정이도 똑같이 우리나라 아이들이잖아요? 저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선생님' 하면서 뛰어와서 제 볼에 뽀뽀하고 잘 모르던 단어를 줄줄 읽어나갈 때면 하루 피로가 싹 풀려요."

이날 재은이와 공부를 마치고 윤씨가 현관문 쪽으로 나섰다. 문까지 배웅한 재은이가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하고 꾸벅 인사한 뒤 다시 거실로 와서 한글책을 또박또박 읽었다. "고추, 오이, 감자, 버섯, 무, 고구마, 옥수수, 배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