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부산플레이스(Pusan Pl)가 있다니까요!"
호주인 사업가 마크 앨런(Allen)씨로부터 이 말을 들었지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드니 북부의 와링가(Warringah) 지역을 찾았을 때 실제로 부산플레이스가 있었고, 여기서 불과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엔 부산리저브(Pusan Reserve), 좀더 가니 가평거리(Kapyong Street)도 눈에 띄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곳 주민 토머스 번(Byrne)씨는 "한국을 돕기 위해 6·25 전쟁에 참전한 호주 군인들의 정신을 기려 1960년대 이들 장소와 거리가 만들어졌다"고 술회했다. 부산과 가평은 호주인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라는 설명도 했다. 그에 따르면 부산은 1950년 9월, 전 세계 국가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한 호주의 육군 제3대대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다. 호주 제3대대는 이듬해 4월 24일 가평전투에서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격퇴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85명의 사상자를 냈다. 호주인들은 한국전 참전 때 기념비적이었던 장소 두 곳을 지금까지 조용하게 기리고 있었던 것이다.
60년 전 한반도에서 자유수호를 위해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던 한국과 호주. 당시 1만7164명의 군인이 참전해 339명이 희생됐던 호주는 2011년, 한국과의 수교 50주년을 맞는다. 두 나라는 이처럼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은, 속 깊은 인연이 참 많다.
단일 기업으로 호주의 최대 고객인 한국의 포스코. 작년에만 호주 철광석 3600만 톤을 구매한 호주 철광석 산업의 '특급 VIP'다.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포스코가 호주와 인연을 맺은 데는 당시 호주대사관 상무관 마이클 케이시(Casey·81)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 그는 선뜻 자원을 제공해줄 외국 투자자가 없던 포항제철의 태동기, 세계 2위의 철 생산국 호주와 박태준 회장 사이 다리를 놓아준 '일등공신'이다.
한국과 호주가 외교관계를 맺은 1961년부터 주한 호주대사관 상무관으로 근무한 케이시는 한국 경제의 잠재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종합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의지도 눈여겨봤다. 한국이 제철소를 지을 테니 투자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 해외 국가들은 코웃음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의 철강 기술이라곤 전쟁 후 거리에 널린 고철을 주워 쇠를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시는 일본에만 있던 호주무역대표부에 "한국이 제철소를 지으려 하는데 투자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호주 정부는 1960년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100달러를 조금 넘던 한국에 투자하길 꺼렸다.
케이시는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 기간산업 건설을 과감히 추진하고 있다. 박태준도 만나봤는데 이 사람도 보통이 아니다. 반드시 철강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정부를 설득했다. 정부가 듣지 않자 "한국전쟁에 뭐하러 참전했었나. 한국이 잘돼야 그때 호주가 흘린 피도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이시가 1년 남짓 설득한 끝에 호주 정부와 철강업계는 포항제철에 철광석을 공급하기로 했다. 1968년 마침내 탄생한 포항제철과 호주의 인연은 그렇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1972년 케이시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호주로 돌아갈 때 박태준 회장은 그에게 직접 감사패를 전했다. 이듬해 포항제철 고로(高爐)에서 최초의 쇳물이 흘러나왔다는 뉴스를 케이시는 호주에서 접했다.
이런 인연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면서 40년 된 호주의 한인 이민역사에서도 시선을 끄는 사건들이 생겼다. 한국 이민자 중 권기범씨가 시장(市長)이 됐고, 지난달엔 호주 외교관인 제임스 최(한국명 최웅)씨가 덴마크주재 호주 대사로 부임하는 쾌거를 이뤘다. 호주도, 한국도 혈맹(血盟)의 인연을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