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출범 12년만에 전례없는 대응에 나섰다.
그리스의 위기가 유로존 존폐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재무장관들은 지난 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14시간에 이르는 긴급 회의를 가진 끝에 1조달러에 이르는 대대적인 금융 안정기금안을 발표했다. 또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례적으로 채권 시장에 개입하겠다고 밝혔다. 회의에 앞서 "아시아 증시가 열리기 전에 비상 대책을 내놓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EU는 창설 당시 회원국들이 각각 고유의 재정정책을 수행해야한다고 정해놨었기 때문에, 이런 협력조치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다. 긴급 대응으로 그동안 금융 시장을 짓눌러왔던 재정위기 확산 우려는 일단 불식될 전망이다. 다만 EU가 창설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구제 금융에 나선 것은 계속 논란으로 남을 전망이다.
◇ EU, 천문학전 안정기금 조성키로..글로벌 공조도 '가속'
유럽연합(EU)은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총 7200억유로~7500억유로(9550억달러) 규모의 금융 안정기금을 조성하는 데 합의했다. 지난 7일에 1100억유로의 그리스 구제금융을 승인한 데 이어 이날 시장의 관측을 뛰어넘는 전례없는 규모의 비상 기금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기금 규모에 '경탄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에릭 닐슨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안정 기금 규모는 굉장하다"며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에서 필요로 하는 돈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양"이라고 말했다. IMF의 고문을 지낸 바 있는 에즈워 브래새드 코넬대학교 이코노미스트는 "EU 회원국들과 IMF는 시장에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엄창난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총대를 멨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안정 기금 설립안이 발표되자마자 ECB는 이례적으로 채권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ECB는 국경을 넘나드는 재정 및 통화 정책에 대해 반대해왔으나 위기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같은 결단을 내렸다. 아직 채권 매입 한도는 정해지지 않았다.
글로벌 공조도 한날 이뤄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비롯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단기 자금 시장에서 달러 경색을 방지하기 위해 통화 스왑 계약을 체결했다.
◇ 안정 기금 어떻게 사용되나
EU가 IMF와 함께 추진하는 안정기금은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 국가를 지원하는 데 사용될 방침이다. 이 중 4400억유로는 유로존 16개국의 대출로, 6000억유로는 EU의 예산으로 집행될 예정이다. 나머지는 IMF로부터 지원을 받는 구조다.
유로존 국가들은 당장 4400억달러를 현금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대신 자금 조달을 위한 특수목적법인을 만들어 돈을 빌려줄 방침이다. 분담금 규모는 경제 규모에 맞게 비례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올리 렌 EU 경제ㆍ통화 담당 집행위원은 밝혔다. 앞서 그리스 지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기금 분담에서도 독일이 가장 큰규모의 보증을 서게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같은 자금 지원은 각국에서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될 수 있다 .
EU의 경우 예산 집행을 통해 600억달러의 자금 지원에 신속히 나설 계획이다. EU는 자연 재해나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을때 예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후자의 조항이 적용됐다. 이에 대해 렌 위원은 "이번 재정위기는 유로 지역의 금융 안정성과 EU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 EU의 '새시대' 열렸나
WSJ는 EU의 전례없는 대규모 금융 지원에 대해 "EU 국가들이 각각 고유의 재정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없애버렸다"며 "EU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했다.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지역적 결속에서 위기 시 책임감도 공유하는 공동체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 전개는 녹록치 않을 수 있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16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안정 기금은 27개 EU 회원국 중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11개 회원국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에 대해 알리스테어 달링 영국 재무장관은 "이번 기금 설립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유로화의 안정을 위한 기금 설립은 여태까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돼 왔다"고 말했다.
또 EU는 유로화 도입 초기의 창설 원칙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유로존 국가들은 재정 문제를 자국 내에서 처리하기로 했었다. EU 조약에는 '구제금융 불가(no bail out)'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는 유로존 또는 EU 회원국들이 EU 내 국가를 대상으로 책임을 져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예로 ECB가 EU 국가에 직접 대출을 해주거나 채권을 매입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 글로벌 금융시장 안도..위험자산 선호 고개들어
그리스의 재정위기로 출렁였던 글로벌 금융 시장은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로화는 이틀 연속 강세를 보였고, 유가는 반등에 성공했다. 유럽과 미국 증시에 앞서 열린 아시아 증시도 강세를 나타냈다. 반면 안전자산 선호로 오름세를 보였던 금 가격은 하락세로 반전했다. 전문가들은 공포감이 누그러지면서 위험 자산 선호가 고개를 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UBS 증권은 보고서에서 "이같은 EU의 이번 `메가 패키지`는 단기적으로 유로화의 급락을 막고 위험 자산 선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BNP파리바는"지난주 내내 지속돼온 위험 자산 매도세가 끝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