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여로'

드라마 속 악녀는 시대별로 또 역할별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중년들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된 악녀는 1972년 KBS 드라마 '여로'의 시어머니 박주아일 것이다.

'여로'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분이(태현실)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로, 분이는 바보 남편 영구(장욱제)를 극진히 보살피지만 시어머니의 구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덕분에 박주아는 시청자들로부터 욕깨나 먹어야 했다.

이렇듯 70~80년대를 거치는 동안 드라마 속 악녀는 주로 심술궂은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반효정 김용림 김영옥 박원숙 등 중견 탤런트 대부분이 적어도 한두 번씩은 시청자들의 미움을 샀다.

MBC 드라마 '신데렐라'
SBS 드라마 '청춘의 덫'

90년대 후반에 들면서 악녀 캐릭터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99년 평균 시청률 35.7%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SBS의 '청춘의 덫'은 심은하라는 '불행한 악녀'를 등장시켰다. 아이를 낳고도 애인(이종원)에게 버림받은 심은하는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며 조금씩 악녀로 변해 간다. 일반적으로 악녀는 시청자들의 미움과 원망을 받으며 캐릭터가 완성되어 가는 게 특징이지만, 심은하는 되레 시청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복수녀의 차가운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줬다. 당시 심은하가 이종원을 향해 이를 갈며 내뱉던 대사 '부숴 버릴거야'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SBS 드라마 '미스터 Q'

이 시기에 SBS는 수목드라마 '미스터 Q'와 드라마 스페셜 '토마토'를 잇따라 히트시키며 악녀 캐릭터를 '잘 나고, 능력 있고, 세련미 넘치는 커리어우먼'으로 진화시켰다. 허영만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미스터 Q'에서는 송윤아가 김민종이라는 유능하고 잘생긴 남자를 사이에 두고 동료 직원 김희선을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했다. 송윤아는 이 캐릭터로 본격적으로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토마토'의 흐름도 '미스터 Q'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김지영이 김석훈을 사이에 두고 역시 김희선을 들들 볶아댄다. 악녀만 바뀌었을 뿐 철저하게 당하며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청순가련형' 상대역이 똑같이 김희선이라는 점이 재밌다.

MBC 드라마 '진실'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

2000년 들어서면서 악녀 캐릭터가 한층 잔인하고 냉정하게 발전한다. MBC '진실'의 박선영은 착하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자기네 집 가정부 딸 최지우를 괴롭히는 악녀로 나왔다. 돈과 권력을 앞세워 최지우의 남자와 꿈을 빼앗지만 결국 모든 게 들통나면서 파멸한다. MBC '이브의 모든 것'의 김소연도 명예를 위해 친구와 연인을 짓밟고 올라선다. 허영과 욕심으로 가득한 김소연은 친구이자 방송국 동료인 채림의 남자 장동건을 차지하기 위해 채림을 배신한다. 세련되고 지적인 외모 뒤에 숨겨진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2001년에는 도지원이라는 악녀가 등장해 이 계보에 한 획을 긋는다.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로 분한 도지원은 앙칼진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매, 찬바람 쌩쌩 부는 거동으로 악녀의 진수를 보여줬다. 특히 그녀가 카랑카랑하게 내뱉던 비명 같은 한마디 '뭬야?'는 유행어가 됐다. KBS2 '러빙유'의 이유리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기업 후계자에게 접근하고, SBS '유리구두'의 김민선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벌의 가짜 손녀가 되려고 몸부림친다. 이 같이 2002년에 등장한 드라마부터 돈, 권력과 결부되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SBS 드라마 '유리구두'
MBC 드라마 '인어아가씨'

악녀 캐릭터는 2002년 MBC 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장서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장서희(은아리영)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 집요하게 복수를 전개하며 시청자들의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33.6%에 이르는 평균 시청률이 장서희의 표독스러움을 대변하고 있다. 이후 2003년 SBS '천국의 계단' 의 이휘향, 2004년 SBS '유리화'의 이응경, 2007년 SBS '조강지처 클럽'의 변정민, 2008년 MBC '달콤한 인생'의 박시연 등이 이런저런 캐릭터로 악녀의 맥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인어아가씨'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악녀 막장드라마'가 등장해 시청자들의 혈압을 한껏 끌어올렸다. SBS '아내의 유혹'이다. 친구의 남편을 빼앗고 친구 목숨까지 노리는 극악한 여자 김서형(신애리)은 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뇌리에 이름 석 자 제대로 새겼을 만큼 완벽한 악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