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晩鐘)의 이창(裏窓)

경기도 양주시 일영 들판에 5월의 석양(夕陽)이 지고 있었다. 세 아낙네 사이로 오십쯤 돼 보이는 사내가 서성이는 모습이 밀레의 그림 같은 분위기다. 그 평화로운 풍경 옆에서 느닷없이 숨 가쁜 소리가 들려왔다.

'추추'소리에 맞춰 말(馬) 두필이 트랙을 콧김 내뿜으며 질주했다. 그 위에서 사내가 월도(月刀)를 휘두르고 있었다. 관우(關羽)가 쓰던 바로 그 창(槍)이다. 살펴보니 운장(雲長)에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수염도 기르고 있었다.

따르는 말 위에선 여인이 매서운 눈초리로 활을 겨누고 있다. 오십여 차례 말을 휘몰던 남녀가 기사(騎射)자세를 취했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었다.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의 그 포즈였던 것이다.

두 무술 남녀의 공연을 마구간 속 스무 마리의 말들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내비게이션도 잘 찾지 못하는 고가도로 밑 공터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성규(高聖圭·48)·윤미라(尹美羅·49) 부부 스토리다.

초록 무성한 들판에서 말 탄 사내가 창을 휘두르자, 대기가 '휙!' 찢어지는 듯했다. 말총머리 여자가 뒤따르며 날개뼈를 움츠렸다 활짝 펴자 활이 팽팽하게 오므라들었다. 엉덩이가 올라붙은 말이 입술을 '부르르' 떨며 돌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말 바이러스

충청도 제천에서 열린 할아버지 제사 때였다. 강원도 영월이 고향인 초등학교 4학년생 고성규는 짐수레 끌고 다니는 말을 거기서 처음 봤다. 순간 혈관에 뭔가가 찌르르했다. "언젠가 저걸 꼭 타봐야겠다!"

고성규는 대관령 축산고에 입학했다. 지금은 교명(校名)이 사라졌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생긴 금오공고 같은 특수고(特殊高)였다. 국민들이 굶던 시절, 고기와 우유를 증산하라는 임무가 이들에게 부여됐다.

축산고생들은 1년에 40일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실습을 했다. 그중에 고2 고성규도 포함돼 있었다. 거기서 다시 조랑말 두 필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주인도 없던 참이었다. 고성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올라탔다.

겁 많은 게 말이다. 사람 귀찮아하는 것도 말이다. 조랑말은 등에 '뭔가'가 오르자 마방(馬房)을 향해 달렸다. 잽싸게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벽에 부닥쳐 크게 다쳤을 것이다. 고성규의 혈관에 잠자던 '말 바이러스'가 다시 살아났다.

고교 졸업 후 고성규는 기아자동차 영업사원이 됐다. 동대문, 청량리, 종로지점을 돌며 숱하게 자동차를 팔았다. 어느 날 신문기사에 눈이 박혔다. "승마(乘馬)가 대중화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운명이 그 순간 변했다.

1993년부터 토요일이면 고성규는 경기 파주, 원당, 일산, 포천을 헤맸다. 말 있는 곳을 찾아 말 타는 법을 배웠다. "10번 타면 될 줄 알았어요. 알고보니 100번은 타야 말을 느끼고 200번 타야 밖에 나갈 수 있었어요."

말 좋아하면 떠도는 인생이 되는 모양이다. 고성규의 직업이 천변만화(千變萬化)했다. '풀뿌리 저널' '리더스비전'이란 격주간지, 중국 보따리상(商), '서울패션', 오리고기 유통회사, 제빵기 납품회사를 정처 없이 흘러다녔다.


#팬티의 피

1993년이 윤미라에게도 '운명의 해'였다. 결혼생활을 정리한 그는 서울여성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취재한다며 기자가 왔는데 그 뒤에 다른 사내가 있었다. 고성규였다. 취재 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한참 뒤 그녀가 화곡동 버스정류장에서 서 있을 때였다. 승용차에서 남자가 머리를 내밀더니 "타라"고 했다. 고성규였다. 여자는 '이상한 남자네, 절대 타지 말아야지'하고 마음먹었다. 뒤에서 버스들이 빵빵거렸다.

고성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윤미라는 낯이 뜨거워 차에 타고 말았다. 팔자(八字)는 원래 그런 것이다. 그때부터 고성규는 괴상한 장소에 괴상하게 나타났다. 서울 정도(定都) 600년 행사를 기념한 보신각 앞 행사 때도 그랬다.

키 작은 사내가 행사장에 지각하게 된 윤미라를 다시 태워주게 됐다. 자주 만나면 탈 나는 게 인간사다. 키 167㎝ 여자와 164㎝ 남자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첫 아내와 이혼한 고성규에게 윤미라는 점점 끌렸다.

둘이 함께 살던 어느 날이었다. 고성규의 팬티가 피로 붉게 젖어 있었다. 아내 곁에는 다가오지도 않고 벽만 바라보고 끙끙거리며 자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백이면 백, 이럴 때 뭔가를 연상한다. "이 남자에게 딴 여자가 생겼구나!"

아내의 추궁에 고성규가 마침내 실토했다. "당신 몰래 승마를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동물이라면 질색하는 게 윤미라다. 알레르기가 심해 곁에만 가면 온몸이 가려워지는 그에게 남편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함께 배우자!"

싫다는 아내를 기어코 승마장에 데려간 '파쇼' 남편 때문에 윤미라는 말을 타게 됐고 마장마술(Dressage)에 빠져들게 됐다. 나중엔 경희대에서 승마지도자 자격증까지 땄다. 그리 괴롭히던 알레르기도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다.

"기마 무예 하는데 여자가 있어야 비주얼이 되잖아요… 남편에게 7년간 배웠죠"

#국토종주

지금 고성규가 달고 있는 타이틀은 세 가지다. '대한청년기마대'의 대장(隊長), 고구려기마문화보존회 회장, 홀스액터코리아대표다. 이름은 하나같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말 사료 값 대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현재 그가 보유한 말은 모두 스물두 필이다. 제일 많을 땐 스물다섯 마리까지 키워봤다. 그는 우리 고유의 과하마(果下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올 2월 죽었다. 죽은 과하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비롯한 두곳에 기증됐다고 한다.

―사주(四柱)에 말과의 인연이 나옵니까.

"그런 건 안 나오는데 명지대에서 고대사 연구하는 한 교수님이 제 족보를 가져가더니 이런 해석을 해오시더군요. 제가 고주몽의 58대손이라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고주몽의 58대손?

"제가 제주고씨이고 본은 횡성이에요. 그분이 오랫동안 여러 역사책을 비교 연구해 그리해준 말씀이니 믿어야지요."

―차 팔고 살았으면 편했을 텐데 왜 그리 직업을 많이 바꿨습니까.

"제가 파는 것엔 재주가 있어요. 기아차 영업소에서 일하다 한 보험회사 지사장으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일은 모르는 겁니다. 아는 후배의 동생이 권유해 '풀뿌리 저널'이라는 격주간지 창간에 간여했어요. 그 주간지는 2횐가 3회 만에 이름을 '리더스비전'으로 바꿨어요. 잘 아실 거 아녜요, 광고 따오고 영업하는 거. 1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다 나왔습니다."

―그 뒤 했다는 보따리상, 서울패션도 다 중국을 상대로 한 거죠.

"보따리상은 중국에 중고차나 자동차 부품을 팔아보려 했던 것인데 여의치 않았고 '서울패션'은 중국 심양과 하얼빈에 근거지를 두고 했던 건데 환율(換率) 때문에 쪽박을 찼지요. 그리고 오리고기 유통업체에 영업과장으로 갔다가 다시 제빵기 납품회사엔 영업본부장으로 갔습니다."

―그때라도 마음을 바꿨으면 지금같은 처지를 면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경기도 원흥승마장이란 곳에서 말 타는 걸 배웠어요. 그즈음 그 승마장에 있던 말 한 필을 샀는데 제가 키울 형편이 안 되잖아요. 소유권만 제가 갖고 원흥승마장에 맡기는 대신 학생들 가르치면서 번 돈으로 말값을 갚곤 했지요. 학생들이 안 오면 일꾼처럼 일도 해주고요. 그때 서울대학생들이 국토종주를 하겠다고 온 겁니다."

―국토종주?

"2002년 월드컵 축구가 열릴 때 서울대학생들이 16강 진입 기원 종주를 제주도에서 임진각까지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자기들끼리 승마를 배우려다 안 되니 원흥승마장을 찾아온 겁니다. 당시 원흥승마장 주인이 돌아가신 강석태씨란 분이에요. 그분이 제게 '학생들 좀 가르치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곤지암의 보이스카우트 수련장에서 '지옥훈련'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지옥훈련인가요.

"처음엔 45명이 왔어요. 6개월 만에 다 떨어져 나가고 10명이 남았습니다. 서울대생 7명, 다른 대학생 두명, 그리고 일반인 한명, 그렇게요. 말 씻기는 법부터 시작해 안장 얹는 법, 말 다루는 법을 배운 뒤 평보(平步) 속보(速步) 구보(驅步)를 주말에 100㎞씩 했어요. 곤지암에서 양평까지가 50㎞인데 왕복하는 거죠. 스폰서도 없어서 1인당 50만원씩 거둬서 자기끼리 밥 해먹고 그렇게 말을 타면 나자빠지지 않을 장사가 없습니다."

―실제로 국토종주를 했습니까.

"제주~부산~울산~경주~대구~대전~오산~평택~양재~한남대교~이태원~서울역~세종로~효자동길~구기터널~통일로~임진각 코스였어요. 완주했지요. 그때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청와대 앞길로 가려 했더니 못 가게 막더군요. '통일염원'이란 말이 앞에 붙었는데도요. 경찰 보호는 생각도 못했고요."

―그럼 일반도로로 왔다는 말인데 굉장히 위험했겠습니다.

"울산에선 말이 도망가 2㎞를 뒤따라가 잡아왔어요. 김천쯤에선 그보다 더 한 일도 있었습니다. 말 타는 게 생각보다 힘듭니다. 그래서 5~10㎞에 한 번씩 기수를 바꿔야 되는데 사람이 갈아탈 무렵 도로에서 청개구리가 확 뛰어오른 겁니다. 말이 놀라 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몰던 카니발 승합차가 나타난 거예요. 말이 더 놀라 뒷발로 확 찼어요. 유리창은 다 깨지고 차가 전부 우그러져 버렸어요."

―저런.

"아무도 후원해주는 사람이 없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민가(民家)에서 김치를 얻어먹을 정도였는데 그 사고로 있는 돈을 다 드려야 했지요. 다시 길을 떠났는데 그 차 몰던 아주머니가 의심이 생겼는지 다음날 쫓아오셨더군요. 신분을 다 밝혔는데도…."

―완주했을 때 기뻤겠습니다.

"말로 다 못하지요. 사실 국토종주를 하기 전에 승마전문가들이 다 '웃기는 발상이다'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 때문에 관심을 보였던 방송사에서도 외면했고요. 심지어 말 편자가 떨어졌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있어요. 구미에 계시던 김동수라는 편자 전문가께서 도와줘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북공정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됐을 때 갑자기 말 두 마리가 도망쳤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보니 암말이 '사랑'을 강요하는 수말을 피해 도망친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덩치 큰 암말은 덩치가 채 절반도 안 돼 보이는 수말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고성규는 혀를 끌끌 차며 "하여간 말 같은 놈들"이라고 험담을 하더니 "쟤네들이 사람보다 더 밝힌다"라고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복사본을 꺼내 들며 "이 그림 안에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무슨 비밀인가요.

"수렵도를 보면 말 탄 기사들이 호랑이를 쫓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요. 말은 호랑이 냄새만 맡아도 도망가는 동물이거든요. 말은 겁이 많아 잠도 서서 잡니다. 새끼도 육식동물을 피해 늪지에서 낳습니다. 그런 말이 호랑이를 쫓다니,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말의 크기를 보세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칭기즈칸이 13세기에 유럽을 침공했습니다. 당시 몽골 말은 유럽 말보다 덩치가 작았어요. 상식적으로 보면 큰 말이 작은 말을 앞발로 찍으면 이길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말의 공격수단은 뒷발인데 작은 말의 회전속도가 큰 말보다 1.5배 빠르거든요. 먼저 맞으면 덩치에 관계없이 승부가 끝나는 겁니다."

―언뜻 생각하기엔 덩치가 커야 유리할 것 같은데.

"큰 말들 사이에 조랑말을 넣으면 큰 말들이 굉장히 긴장해요. 작은 말은 지구력이 강하고 산속에서도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 몽골 말보다 600년이나 앞선 5~7세기에 우리의 고구려 말들이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잊고 있지만 고구려 말들이 세계 기마문화사에 대단한 존재였던 거지요."

―그럼 말이 대단해 호랑이 사냥을 했다는 건가요.

"말뿐 아니라 화살도 유럽 것보다 작았지요. 중요한 것은 화살입니다. 바로 명적(鳴鏑)이라는 건데요, 끝이 이렇게 삼각형이 아니라 도깨비 뿔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표피에만 꽂히게 만든 겁니다. 이유가 있어요. 살 속으로 파고들면 호랑이는 반드시 역습을 합니다. 그럼 표피에만 꽂힌 화살을 맞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겠어요. 달리면 달릴수록 그 화살이 채찍처럼 호랑이 몸을 자꾸 때리겠죠?"

―듣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그뿐 아니에요. 화살촉엔 작은 구멍이 있었습니다. 야생동물이 제일 싫어하는 게 가공(加工)의 음향입니다. 날아갈 때 '삐익'하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도망치는 게 동물이지요. 이런 원리로 호랑이를 지치게 만든 뒤 한쪽으로 몰아 사냥했던 겁니다. 어때요, 대단하죠?"

―우리 말이 더 우수한가요, 몽골 말이 더 우수한가요.

"삼별초라고 아시죠? 국민들이 그건 대개 알고 있는데 마별초(馬別抄)에 대해선 잘 모르더라고요. 몽골에 맞서 항쟁한 부대인데 전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끝내 몽골군이 다 잡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우리 말은 과하마라고 과일나무 사이를 빠져나갈 만큼 덩치가 작다고 해 붙은 이름입니다. 몽골 말들이 보통 초원만 누비다 산이 많은 우리 땅에 왔으니 얼마나 고전했겠어요. 그러다 고려가 항복하고 몽골이 제주도에 '묵호'라는 말 목장을 설치했습니다. 몽골 장수급들이 타던 말을 '조로모로'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 과하마와 교배해 '조랑말'이 된 거지요."

―어떻게 그런 데까지 관심을 갖게 된 겁니까.

"독일인들이 승마에 참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제게 이런 이야길 하는 거예요. '너희 나라 TV드라마는 다 엉터리다. 화면에 보면 안장이며 고삐, 재갈이 다 유럽에서 만든 건데, 그 시대에 그런 게 있었느냐'고요. 심지어 화면에 비치는 안장엔 영어로 K자나 J자가 보이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 말은 어땠을까 하고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사실 아까 얘기했던 국토종주도 원래 옛 고구려 국내성(國內城)까지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북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니…. 제가 사실 일영에서 말을 기르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북한~중국을 거쳐 실크로드까지 가보고 싶어서요."

―그럼 무예(武藝)는 왜 하게 된 겁니까.

"고구려의 기마문화를 알리려 시작한 거지만 아예 제 필생의 업(業)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건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계가 있어요."

―동북공정?

"몇 년 전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고대체육사에 고구려 기마문화가 은근슬쩍 등장합니다. 고구려 기마문화를 가로채려는 것이지요. '적벽대전' 혹시 보셨어요? 거기 느닷없이 호랑이 사냥하는 장면이 나오죠. 삼국지에 갑자기 왜 호랑이 사냥입니까. 그게 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자기들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게 아니고 뭔가요."

―벽에 보니 검, 창, 곤(棍) 같은 무기들이 있는데.

"저건 다 모래네 형제대장간에서 주문해 만든 거예요. 보실래요?(월도를 보여주며) 날이 서 있죠? 이따 보면 알겠지만 전 진짜 무기만 씁니다."

―마상무예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우리에게 남은 건 '무예도보통지'밖에 없어요. 북한과 일본에 자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걸 구해 혼자 훈련했지요. 저보고 사이비 아니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게 정답이다'라고 할 사람 역시 없을 거예요."

말은 소화를 잘 못 시키기 때문에 부부는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운다. 사람 입엔 라면이 들어가지만 말에겐 소화촉진제까지 먹이는 이유다.

#일식집 창업비용

고성규가 만들고 아내 윤미라가 대표로 있는 승마클럽 '마구간'은 1000평 규모다. 말 두 마리를 샀을 때 부부에게 승마장용 땅을 빌려주겠다고 한 기업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말을 끌고 들어가려 하자 그가 변심(變心)했다.

하루아침에 갈 곳 없어진 부부는 두 달 동안 전국을 돌며 부지를 물색했다. 그리곤 축사(畜舍)로 쓰다 폐허가 된 이 땅을 월세로 빌렸다. 2003년의 일이다. 부부는 석 달 동안 맨몸으로 이 폐허를 일궈 지금 같은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이 땅은 공짜로 얻은 겁니까.

"아내가 일식집 차리려고 모아놓은 돈을 끌어다 썼지요."

―일식집 창업비용을?

"마포에 식당을 차리려고 거의 계약을 할 단계였어요. 그런데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난 평생 말 키우고 고구려 기마문화를 되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제 뜻을 따라주더군요."

―고구려 기마문화 재현도 좋지만 그래서야…. 돈을 벌긴 합니까.

"지방자치단체 행사 때 말 다섯필을 이끌고 가 공연을 하지요. 처음엔 알리려 무료봉사를 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겨 회당 1000만원 이상씩을 받습니다."

―생각보다 수입이 짭짤해 보입니다.

"작년엔 신종플루 때문에 봄 가을의 행사가 거의 다 취소됐고 올해엔 천안함 사태 때문에 똑같은 일을 겪고 있어요. 돈 생기면 마이너스 통장에 넣었다가 일이 없으면 쭉 빠지고, 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가진 말이 모두 스물두필이지요? 한 달 사료값이 얼마나 듭니까.

"한 달에 800만원 가까이 들어요. 제대로 먹이려면 한 마리당 한 달에 50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좋은 영양제도 못 먹이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럼 두 분은 뭘 먹고 삽니까.

"저흰 주로 라면을…."

―그래도 말 스물두필이면 꽤 값이 나가지 않나요.

"제가 가진 말 중에 제일 비싼 건 5000만원쯤 합니다. 벨기에 산으로 마장마술 하던 거였는데 죽었지만요."

―말이 참 다루기 까다로운 동물이라는데 죽기도 많이 죽었겠지요.

"말이 죽는 건 주로 소화불량 때문이에요. 그럼 금세 복통이 오거든요.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수의사를 불러도 소용이 없어요. 일찍 알면 물을 많이 먹이고 운동을 시켜주거나 장운동 촉진제 같은 걸 먹이면 되지요. 얼마 전 죽은 과하마는 아내가 낳을 때부터 7년을 키우던 거였어요. 한참을 울었습니다. 앓다 죽는 것도 있지만 폐마(廢馬)하는 것도 있어요. 뇌척수염에 걸리면 뒷다리가 사람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돌아가거든요."

―행사 때 보통 몇명이 합니까.

"시연자(試演者)는 보통 6~7명이고 스태프가 5~6명 필요합니다. 다 제 제자들인데 제가 먹여 살릴 수 있으면 다 데리고 있을 텐데 제 사정이 그러니, 보통 때는 생업을 하다 공연이 있으면 '헤쳐 모여'하는 식이지요."

―그렇게 힘든데 포기해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이게 국가에서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개인 영달을 위한 것도 아니고 참 그래요. 사실 우리 문화 보존은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인데, 대학에 관련 학과도 없으니 제가 할 수밖에요."

―홀스액터코리아라는 회사가 영화나 드라마와 관련 있는 것 같은데 출연 제의는 있었나요?

"만든 지는 한참 됐는데 돈이 없어 홈페이지를 겨우 얼마 전에 오픈했어요. 출연제의는 없었고 드라마 '천추태후' 49회 때 '마필 감독'으로 딱 한 번 출연한 적이 있어요. 사극(史劇)에 무술감독은 있는데 왜 '마술감독'은 없는지 참 이해가 안 돼요."


#내 남편은 또라이

고성규가 촬영 준비를 하기 위해 나갔다. 밖을 보니 윤미라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말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를 부르자 이런 말이 나왔다. "남편은 '파쇼'예요. 취재한다는 얘길 오늘 아침에야 했어요. 촬영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고요."

'정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한마디로 '또라이'예요. 누가 '미쳤다'고 해도 전 맞다고 봐요. 저렇게 말만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미치면 와이프도 미치게 되더군요. 참~."

―결국 마장마술을 하게 된 것 때문에 그럽니까.

"처음엔 내켜하지 않다가 독일도 가고 호주도 갔어요. 승마를 제대로 배워보려고요. 제 꿈은 스페인 왕립학교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경희대에서 승마지도자자격증을 땄고 남편은 용인대에서 라이선스를 획득했어요. 우리 승마 지도자 중에 기수(騎手) 출신들이 많은데 사실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20%도 안 돼요."

―자격증은 노후를 대비한 겁니까.

"언젠가 OBS-TV의 '명인 명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출연자 가운데 80%가 인간문화재였어요. 인간문화재는 계보가 내려와야 되잖아요. 고구려 마상무예는 계보가 없는 것이니 그분들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되고요. 전 기마문화를 되살린다는 남편 뜻에 공감해요."

―자제들을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저희야 그러고 싶지만…. 제가 낳은 딸 둘이 서른살, 스물아홉인데 겁이 많아서. 남편이 낳은 아들은 이번에 해병대 입대하고 딸은 아직 고교생이에요."

―부부의 노력을 몰라주는 세상이 원망스럽습니까.

"저희가 미2사단에서 시작해 성남 미 공군, 용산 미8군에서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우습게 보는 것 같더니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줬어요. 하와이에까지 초청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정작 외국인들은 인정하는데 우리는 관심이 없으니 그건 좀 그렇지요."

―그나저나 천안함 사태 때문에 놀아서야.

"6월 5일에 임진각에서 기마무예축제를 해요. 6월 20일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마상무예 공연도 하고요."

―무술은 남편에게 배웠습니까.

"기마무예 하는데 여자가 있으면 비주얼이 꽤 괜찮지요. 남편에게 7년 동안 배웠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무기를 건네주며) 이거 한번 들어보세요. 남편은 월도를 쓰고 전 쌍검(雙劍)이나 화살을 주로 들어요."

―알레르기는 어떻게 사라진 겁니까.

"어느 날부터 말이 사랑스러워졌어요. 눈도 예쁘고. 제가 고양이를 120마리 정도 키우는데 다 제 손으로 받은 거예요. 강아지도 그렇고."

―이름이 아름다울 미(美)에 비단 라(羅)인데 지금 삶이 아름다운 비단입니까.

"원래 제 아버지 집안에 화가가 많았어요. 저도 학교 다닐 때 화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합창을 하게 되고 다시 어쩌다 이 사람을 만나서.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일식집 창업자금을 내줄 때 '속았다'싶은 생각이 들진 않던가요.

"그때 모아 놓은 돈이 1억5000만원쯤 됐는데, 남편이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니. 남자는 하고 싶은 걸 해야지요. 저이가 영업에는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그런데 지금도 사진을 안 찍을 생각입니까.

"(벌떡 일어서며) 준비하고 나올게요. 그런데 전 뭘 하면 되는 거죠?"

만종 같은 풍경 속에 들려온 소음의 내력은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말 위에서 달리며 부부는 계속 다퉜다. 앞에서 달리는 남편이 휘두르는 월도 때문에 아내가 근접하지 못하자 남편은 화를 냈고 아내는 "창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러다 고성규가 보여준 무용총 수렵도 장면이 떠올랐다. 부부에게 그 자세를 취할 수 있겠느냐고 하자 "굉장히 힘든 포즌데"라면서도 말 위에서 뒤돌아 활을 당겼다.

부부의 이마는 땀으로 젖었고 기자의 구두는 먼지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