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생 유세희(70·한양대 명예교수)는 같은 과 동기 이수정(전 문화부장관·작고), 철학과 서정복 등과 함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발표할 선언문을 쓰고 있었다. 시위 예정일은 4월 21일. 그러나 이날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가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거사(擧事)'는 19일로 당겨졌다.
이튿날 시위에 나선 유세희는 경찰의 진압봉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는 혁명유공자가 됐다. 그는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 3·15 부정선거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치르라는 것이었는데 정치깡패의 시위대 습격과 경찰의 발포로 정권타도 혁명으로 번졌다"고 했다.
부산 동아대 재학 중 4·19에 참여한 박관용(72) 전 국회의장은 "당시 대학생들이 가졌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전근대적 산업구조 등 복합적인 요인이 4·19로 분출했다"고 기억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신흥독립국에 대한 참여 의식이 강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너무 동떨어져 있었고 대학을 나와도 취업할 변변한 기업 하나 없는 암담한 상황이 학생들의 현상 타파 의지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혁명 후 정권은 민주당에 넘어갔지만 불과 1년 만에 5·16으로 군부가 집권했다. 고려대 재학 중 4·19를 경험한 이원종(71)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당시 민주당 정권에서 혼란이 오죽했으면 5·16 발발에 '올 것이 왔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며 "민주주의는 그만큼 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무질서보단 5·16이 '차악(次惡)'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시각엔 "4·19가 시(詩)라면 5·16은 밥이었다"(주대환(56)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는 평가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이후 가져온 산업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반영돼 있다.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維新) 선포는 민주화운동의 불꽃을 재점화시켰다. 이 전 수석도 "국민의 정부 선택권을 없애버린 유신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산업화 바람을 타고 기계공장을 운영하던 이 전 수석은 유신 직후 사업을 접고 제 발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의원을 찾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반유신투쟁 과정에서 세 번이나 구속된 이재오(65) 국민권익위원장은 "유신은 나 개인 의지에 의한 삶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로 1965년 중앙대에서 제적되고 강제 징집된 이 위원장은 69년 제대할 때만 해도 평탄한 삶을 살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3선(選)개헌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이 시위 전력자의 복학을 막으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졌고 유신까지 겹치면서 독재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건국과 산업화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종신집권을 기도하다 국민의 저항에 부딪힌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