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저녁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1동 집으로 퇴근하던 박승현(32)씨는 아스팔트에 움푹 파인 구멍 때문에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도로가 길이 1.2m, 깊이 5㎝가량이 파여 있었다. 박씨는 휴대전화 사진기로 파손된 도로를 찍었다. 박씨는 어디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이거바'사이트(www.fixmystreet.kr)를 보고 도로 사진을 올렸다. 3일 뒤 그는 대전시 건설관리과로부터 "곧바로 도로를 보수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박씨는 "관청에 알리면 절차가 복잡할 것 같았는데 손쉽게 해결됐다"고 말했다.

이거바는 '이 거리를 바꾸자'의 줄임말이다. 이거바 사이트는 일반 시민들로부터 파손된 도로나 잘못된 표지판이 있다는 제보를 받아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나 서울시 '시민불편 살핌이' 같은 민원게시판에 올리거나 해당 관청에 알리는 일을 한다. 참고 지내긴 불편하고 직접 나서 제보하기는 귀찮은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는 인터넷 도우미인 셈이다.

1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거리에서 시민운동단체‘이거바(이 거리를 바꾸자)’회원들이 길거리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신동진씨, 김대호씨, 조세영씨, 이 범재씨.

이거바는 영국의 '픽스마이스트리트(Fixmystreet·내 거리를 고치자는 뜻)'사이트에서 유래했다. 2007년 2월 시민들이 시작한 픽스마이스트리트는 영국 법무부가 후원을 한다. 지금은 일주일에 1700여 건이 넘는 시민 제보가 접수된다. 영국의 성공사례를 알게 된 사회디자인 연구소 김대호(47) 소장이 "우리도 우리가 다니는 길을 스스로 고쳐보자"는 생각에서 한국형 픽스마이스트리트인 '이거바'를 만들었다. 김씨는 작년 8월 이범재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 주영남 열린사회 시민연합 대표, 홍순기 비타소프트 대표 등 7명이 모여 7개월간 작업해 3월 1일 사이트를 열었다.

이거바는 이용료가 무료다. 운영비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에 사이트를 만드는 데 500만원이 들었을 뿐이다. 사이트 관리는 신동진(44·한국장애인방송 기획국장)씨와 조세영(30·장애인 인권포럼 연구원)씨 둘이서 맡아 무료로 봉사하고 있다.

시민들이 길을 가다가 파손된 도로, 고장 난 가로등·신호등, 잘못된 교통표지판을 발견하면 휴대전화 카메라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이거바 사이트에 올리고 인터넷 지도에 위치를 표시하면 된다. 사이트는 민원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진척 정도를 댓글로 중계해 준다. 민원이 해결되면 해당 관청이 문서나 이메일 내용을 사이트에 올려 알려준다. 보통 제보한 지 3~6일 만이면 민원이 해결된다고 한다. 김 소장은 "이거바는 사진을 찍어 바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과 인터넷 지도 서비스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이 이거바 사이트에 제보해 깨끗하게 고쳐진 서울 영등포구 신길 3동 성락교회 앞 사거리 자전거 도로(사진 위)와 말끔하게 단장된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로 인근 버스 안내판(아래).

사이트를 개설한 지 한 달여 만에 63건의 제보가 들어와 51건이 해결됐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는 길가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보트 2대가 제보 6일 만에 거리에서 사라졌다. 서울 영등포구 주민 최만선씨는 "한 달째 불이 들어오지 않는 동네 가로등 사진을 찍어 이거바 사이트에 올렸는데 6일 만에 가로등 불이 다시 환하게 켜져 '이거 봐라'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도로를 다니기 힘든 장애인들도 '이거바'의 도움을 받고 있다. 경기도 성남 중원장애인자립센터 이경환(42) 소장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10건의 민원을 이거바 사이트에 올렸는데 3건이 3일 만에 해결됐다"며 "장애인들에게는 '보물'같은 사이트"라고 했다.

공무원들도 이거바를 반긴다. 고양시 일산동구청 직원 김태일(34·8급)씨는 "기존 민원은 사진이 없거나 위치도 불분명해 해결하기 쉽지 않았는데 이거바 민원은 사진을 보고 투입할 장비나 인원을 가늠할 수 있고 지도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남시 중원구청 직원 이상진(32·8급)씨는 "이거바를 통해 들어온 민원 4건을 사흘 만에 모두 처리했다"며 "다른 민원보다 처리가 2~3배 빠르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은 "우리가 할 일을 시민과 이거바가 알아서 해주니, 이런 일로 바빠진다면 고마울 따름"이라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