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낮 12시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남양주종합촬영소 제3스튜디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의 첫 세트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밥차'가 막 도착해 스태프들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지만, 미술팀과 소품팀은 여전히 소품을 재배치하고 세트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쯤 촬영을 시작하려 했으나 임 감독이 세트 미술에 퇴짜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임 감독은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중요한 초반 장면인데 필요한 대·소도구가 없어서 다시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벽지를 좀 낡게 보이려고 물을 뿌리고 있던 주병도(51) 미술감독은 임 감독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게 뻔한데도 "좁은 공간에서 원하는 앵글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감독님이 고생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취화선'부터 임 감독 영화의 미술을 맡아온 베테랑이다.
총 60회차 촬영 중 48회차인 이날은 전주시청 7급 공무원인 주인공 필용(박중훈)이 승진을 위해 시의 주력부서인 한지계(韓紙係)로 발령받은 뒤, 집에 앓아 누워있는 아내(예지원)에게 발령 소식을 전하는 장면. 영화에서는 불과 몇 분 되지 않겠지만, 1주에 걸쳐 20여평짜리 한옥을 짓고 한지로 장판과 벽지도 발랐다.
300평 규모 스튜디오에 모인 스태프는 80여명. 미술·소품팀이 세트를 마무리하면 조명팀은 감독이 주문한 "한지를 댄 창살문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햇볕"을 만들고, 이어 촬영감독이 촬영 동선을 검토한다. 이때 감독과 배우가 등장하고 동시녹음팀까지 가세하면 촬영 준비가 끝난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촬영한 집과 똑같이 만든 세트엔 툇마루와 거실, 안방, 작은방, 부엌이 있었다. 현지 촬영으로는 불가능한 촬영을 위해 모든 방의 한쪽 벽은 헐려 있었다. 주로 20~30대인 스태프들은 사다리나 소품, 조명기구를 날랐다. 상당수가 공구와 테이프를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공사현장 같았다. 이 영화 제작자인 전주국제영화제의 부집행위원장인 김건(45) 제작이사는 "스태프들과의 회식에서 '왜 이 영화에 참여했느냐'고 묻자 한결같이 '임 감독님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오후 3시쯤 세트 재정리가 끝나자 임 감독이 나타나 세트를 점검했다. 그는 화분 위치를 바꾸고 안방 TV도 평면 TV에서 브라운관 TV로 바꾸면서 다시 세심하게 지시했다. 그때마다 젊은 스태프들이 묵묵히 물건들을 져 날랐다. 아침 일찍 도착해 그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배우 박중훈과 예지원이 스튜디오에 들어서 임 감독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고 카메라도 세팅을 마쳤지만, 임 감독은 다시 '감독 대기실'로 되돌아갔다.
임 감독 작품에 처음 출연하는 박중훈은 "다른 영화들이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돌아간다면, 임 감독님 영화는 감독의 크리에이티브 속에서 시스템이 돌아간다는 것이 큰 차이"라며 "워낙 배우들과 작품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쪽대본'을 받아도 당황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카메라는 오후 5시가 돼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