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을 공기업 사장이 되게 해주는 대가로 뇌물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의 피고인 신문(訊問)이 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한 전 총리는 그러나 전날(3월 31일) 공판에서 예고한 대로, 진술거부권(묵비권)을 행사했다.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의 한가운데 증인석에 앉은 한 전 총리는 신문하는 검사 쪽 방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 전 총리가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검찰은 1시간가량 신문사항을 그냥 읽어내려가는 방식으로 신문을 진행했다. 한 전 총리는 작년 12월 검찰조사 때는 성경책을 한 손에 든 채 묵비권을 행사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형두)는 “피고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검찰이 신문할 권리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질문을 하되 검찰 신문사항 가운데 답변을 강요하거나 유도신문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재판부가 사전검토를 거쳐 제외한 뒤 진행하도록 했다.
검찰은 신문 과정에서 “한 전 총리가 2008년과 2009년 곽영욱씨 소유의 제주도 골프빌리지에서 골프를 칠 때 ‘한이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공개했다. 한 전 총리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약한 뒤 골프를 쳤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측은 ‘골프 라운딩’과 관련해, 당초 “동생 부부가 라운딩할 때 따라다녔을 뿐 골프를 직접 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었지만, 이 사안 관련 검찰 수사자료들을 법정 증거로 채택하는 데는 동의해 수사내용에 사실상 이의를 달지 않는 것으로 해석됐다.
검찰은 앞서 곽영욱씨와 한 전 총리의 ‘친밀한 관계’를 입증하기 위한 정황증거로 이 자료들을 법정에 제출했다.
검찰은 또 이날 한 전 총리의 아들 박모씨의 미국 유학비용과 관련해 미국 은행인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박씨의 계좌내역을 확인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증거개시명령을 해줄 것을 신청했다.
검찰은 "박씨는 2008년 미국 보스턴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4만5000달러 이상의 예금잔고가 필요했던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한 전 총리가 곽영욱씨에게 받은 5만 달러도 아들 학비로 사용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날 공판은 오전 11시 20분 시작됐으나, 변호인이 A4용지로 20페이지가 넘는 검찰의 신문사항을 검토하기 위해 재판이 잠시 중단되고, 이어 재판부가 개별 신문사항의 당부(當否)를 일일이 정해주면서 오후 7시 40분이 넘어서야 검찰신문이 시작됐다.
재판부는 이날 검찰신문이 늦어짐에 따라 변호인의 반대신문은 2일 실시하고, 같은 날 결심공판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1심 선고공판은 오는 9일이다.
2일 결심공판에서는 검찰이 한 전 총리에게 적용할 법률과 형량 등을 설명하는 논고(論告)와 구형(求刑)을 하게 되며, 변호인단의 최후변론에 이어 한 전 총리 본인이 최후진술을 하게 된다.
곽영욱씨가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건넸다는 2006년 12월 20일 당시 환율은 1달러당 1000원 미만이어서 한 전 총리는 수뢰액이 3000만~5000만원일 때 적용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2조 3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데, 법정형은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돼 있다.
한편 이날 검찰의 피고인 신문에 앞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한 전 총리가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검찰이 신문 자체를 할 수 없는지, 검찰이 신문을 못하면 변호인 신문도 못하는지 등을 놓고 전날에 이어 이틀째 공방을 벌였다.
재판부는 전날 공판에선 “피고인이 묵비권을 행사하는 이상 실질적으로도 무의미하다”며 검찰 신문을 제한하겠다고 했으나, 이날 “피고인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유도신문 성격의 질문 등은 변호인 검토를 거쳐 재판부가 걸러낸 뒤 검찰 신문을 허용하겠다”는 절충안을 냈다. 검찰측은 “재판부에 소송지휘권이 있는 만큼 재판부의 판단에 따를 것”이라며 이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