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이규용(64)씨는 40~50년간 모아온 4000권의 책이 5t과 1t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갑자기 텅 빈 방 3개를 돌아보면서 딸을 시집보낸 듯 시원섭섭했다고 한다. 이 장서들은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됐다. 월간지 '조광'에 연재됐던 홍명희의 '임꺽정' 초간본, '청록집' 등 동인지, '사상계' 창간호 등 수집가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책들이 가득하다.

"인터넷 헌책방 매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어떤 건 수백만원 나가더군요. 무슨 근거로 그런 액수가 매겨졌는지 모르지만…. 내가 모아두지 않으면 좋은 책들이 없어지고 말겠구나 싶어 전부터 수집을 시작했어요. 기증은 당연한 거죠. 내 손을 떠나야 연구자나 학생들이 참고하고, 그래야 책에 담긴 뜻이 살아남지요."

이규용씨는“책을 모으며 알게 된‘재야의 고수’들이나 그 유족들은 엄청난 장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들 한다”며“좋은 주인을 찾아주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기업 홍보실과 방송국에서 일했던 그는 월급이 40만원이던 시절 인사동 헌책방에서 찾은 '임꺽정' 초간본을 20만원 주고 사버렸다. 헌책방 주인들과 친분을 쌓은 뒤 '좋은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오면 부리나케 출동했다고 한다. 쌓이는 책더미에 질색하던 식구들을 뒤로하고 그는 색이 바랠까, 찢어지기라도 할까 그야말로 책을 모시고 살았다. 그렇게 정든 책들을 기증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전에 일했던 방송국에 400권을 기증했지만 관리가 안돼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한 번은 유명 사립대에 기증 의사를 밝혔더니 그 대학은 '우리가 일별해보고 가치 있는 것만 골라가겠다'고 하더군요. 대학에 맡기면 몇 해 뒤 그림이 뜯겨 나가고, 좀 가치 있다 싶으면 없어지기도 해요. 수집가에게 책은 자식 같은 건데, 누가 기증하고 싶겠습니까?"

그가 가진 책들에 대한 소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까지 들어갔다. 연구원에서 먼저 기증 의사를 물어왔다. 그는 '이제야 주인을 찾았구나' 싶어 응했고, 연구원 장서각에는 오는 7월 이씨의 개인문고가 생긴다.

"얼마 전에 국가보훈처에서 '안중근 의사 사형명령기록'을 공개했죠. 기록 앞에는 장사 없습니다. 제가 잡지와 동인지 수집에 열성이었던 이유도 그겁니다. 요즘 젊은이는 인터넷에 일회성 정보가 넘치니 '기록의 힘'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