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의 최대 격전장인 뉴욕. 랠프 로런,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캘빈 클라인, 마이클 코스, 도나 캐런….
패션 디자인에 종사하는 사람만 5만8000여명에 매년 1000여명의 디자인학교 졸업생이 쏟아지는 곳. 이런 뉴욕 패션계가 인정하는 두 명의 한국계 디자이너가 있다. 두리 정(37)과 리차드 채(35).
이들은 보그, GQ 등 비평가들의 눈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각각 자신의 컬렉션을 확대해 사업 성공을 거두고 있다. 세계 패션의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 패션업계는 이들의 성공에서 해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조선경제는 뉴욕의 신예 디자이너 가운데 선두를 달리는 두 사람을 만나 성공공식을 탐구해 보았다. 자신감과 재능, 도전정신과 노력, 부모의 지원, 한국에 대한 자부심. 이들은 김연아로 상징되는 우리의 'G세대'를 연상케 했다.
◆패션 본무대에서 성공하는 한국계 디자이너
뉴욕 패션위크가 시작된 지난달 11일 오전 11시 브라이언트공원 내 텐트. 리차드 채가 만든 세컨더리 라인(최고급 디자이너라인보다 가격을 낮춰 접근이 쉽도록 만든 옷)인 '러브'를 모델들이 걸치고 런웨이를 걷자, 객석에 앉았던 비평가와 백화점 구매 담당 임원들은 눈을 반짝였다.
패션 전문 사이트인 '스타일닷컴'은 "모델들이 걸쳤던 옷을 집으로 들고가는 것은 좋은 신호"라고 후한 점수를 줬다. 소매업자들이 행복하도록 충분히 입을 만한 옷이면서도 패션 에디터와 예술취향의 애호가를 만족할 정도로 에지 있었다는 평가였다. 리차드 채의 쇼는 뉴욕타임스가 패션위크 기간에 운영하는 스코어카드에서 이날의 '승자'로 선정됐다.
'드레이핑의 여왕'으로 불리는 두리 정은 이번 뉴욕 패션 위크 기간에 맨해튼 서쪽 갤러리에서 쇼를 열었다. 그에게는 보그, GQ 등 패션 미디어와 버그도프굿맨, 니먼 마커스 등 대표적인 백화점 구매 담당 임원들이 따라다닌다. 패션전문지인 WWD와 허핑턴포스트는 여성적인 디자인을 하는 두리 정이 이번 쇼에서 밀리터리 터치를 가미한 옷을 선보여 두 가지 상반된 아이디어를 훌륭하게 조화했다고 평가했다.
두리 정의 패션은 올봄 뉴욕 매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년 가을 뉴욕 패션쇼에서 선보인 두리 정의 그레이컬러, 쉬어 룩, 디테일한 드레이핑 등 봄 패션은 자라, H&M 등 패스트패션업체들이 올봄 매장에 베껴서 내놓고 있다고 한다. 뉴욕의 패션 전문업체인 도너거그룹의 체리 김 트렌드 애널리스트는 "두리 정과 리차드 채는 뉴욕의 이머징 디자이너 가운데 선두주자"라며 "올봄 패션에서도 백화점 등의 고객들에게 두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 패션의 다이내믹스에서 셀러브리티(cele brity)는 유행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두리 정과 리차드 채의 고객 명단을 보면 미국 대중스타들의 이름이 즐비하다. 오프라 윈프리, 드루 베리모어, 제니퍼 로페즈 등이 리차드 채의 옷을 입고 있다. 영화 '트와이라이트'의 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 레이철 맥애덤스, 메건 폭스 등이 두리 정의 옷을 걸친 가장 최근의 스타들이다.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일하라"
두리 정과 리차드 채는 둘 다 뉴욕의 명문 패션 스쿨인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우등생이다. 두리 정은 이 학교 3학년 때 파슨스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실전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리 정은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제프리 빈 밑에서 6년간 일했고, 리차드 채는 도너 캐런, 마크 제이콥스, TSE에서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했다.
두리 정은 "보통 디자이너들은 스케치만 하기 십상인데 제프리 빈의 회사에서는 엄격한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스케치는 물론 재단, 바느질까지 모두 했다"고 말했다. 특히 현장 근무는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성을 요구하는 게 매력이라는 것.
리차드 채는 1학년 때부터 인턴을 시작했다. 제프리 빈, 갭 등에서 인턴을 했고, 랑방에서 스케처,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에서 보조 디자이너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창의성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는 공부로 1등을 하는 것보다 패션 세계에서 필요한 경험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일했다는 것은 뉴욕 패션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이력서이기도 하다. 마치 법률가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것과 같은 의미다. 이 이력서는 크리에이티브를 창출하는 뉴욕 패션계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이는 안내장이기도 하다.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일할 기회를 갖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뉴욕시의 통계에 따르면, 매년 뉴욕에서만 배출되는 디자이너 졸업생이 1000명가량 된다. 하지만 상위 20개 디자이너 회사에서 제공되는 기회는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정민수 SK네트웍스 패션사업부문 뉴욕법인장은 "두리 정과 리차드 채는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불과 몇 년 만에 디렉터의 자리에 올랐다"며 "일반 회사로 치면 20년 가까이 걸리는 과정을 뛰어난 재능으로 압축해 해치운 천재들이다"라고 평가했다.
유명 디자이너 밑에서 일하는 것은 혹독하다. 두리 정은 제프리 빈에서 일할 때 "매일 오늘이 회사에 다니는 마지막 날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21세에 입사한 그는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이 40대였으며 평균 연령이 60대였다고 했다. 엄격한 도제 시스템 속에서 매일 험한 고성이 쏟아지는 상황을 견뎌냈다.
리차드 채는 마크 제이콥스에서 디렉터로 일할 때 3개 컬렉션을 책임졌지만, 보조 인력은 단 2명이었다. 너무 일이 많아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집을 얻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1년 365일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했던 기간"이라고 말했다.
◆"한국적인 것은 자신감과 일하는 태도"
두리 정은 4살 때 부모가 미국으로 왔고 리차드 채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미국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성공엔 부모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했다. 뉴저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두리 정의 부모는 지하실에서 두리 정이 자신의 라인을 시작하도록 도왔고 옷감을 나르는 일도 했다. 뉴욕에서 투자은행가로 일하는 남동생은 비즈니스 플랜을 짜주었다.
리차드 채는 중학교 때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가 차를 몰고 파슨스 디자인 학교의 야간 강좌를 듣도록 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패션세계에서 한국적인 것은 근면과 성실, 자부심 등 내면적인 성품과 태도이지 한국 고유의 색깔과 문양은 아니라고 했다. 두리 정은 "옷을 보자마자 한국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이미 패션이 아니라 고유 복장(costume)"이라고 말했다.
리차드 채도 "뉴욕 패션 산업에는 디자인, 제작, 스타일, 메이크업 등에 한국인이 활약하는데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태도, 디자인에 대한 순수하고 정직한 접근"이라고 말했다. 각자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이들은 똑같은 말을 남겼다. "부모님들은 보그지에 내 얘기가 실리면 시큰둥한데, 한국 신문에 실리면 너무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