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도 두부 사라고 종을 치며 골목길을 다니니까 누가 인간문화재라고 그러더라고요."

지난 5일 만난 장수환(張秀煥·76)씨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는 종로구 교남동 일대에서 50여년간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두부를 팔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두부 12모가 들어 있는 모판과 종을 들고 식당이 몰려 있는 종로구 신문로와 교남동 일대를 돈다. 두부 모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장수'라는 글씨가 써 있다.

그는 "지금 치는 종도 세운상가 불교용품점에서 어렵게 구해 10년째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며 "요즘은 다 확성기를 사용해서 내가 죽으면 두부 종을 치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집 마당에 걸린 칠판에 오늘 판매한 두부 개수를 적어놓던 그는 "요즘은 예전의 절반 수준인 하루 두부 100모 정도가 나간다"고 했다.

두부 모판을 든 장수환씨가 종을 치며 골목길에서 두부를 팔고 있다.

하지만 장씨도 이제는 두부 모판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터를 잡고 두부를 팔았던 돈의문 일대에 뉴타운 사업이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뉴타운이 본격 시행되면 거래처인 식당들이 자리를 옮길 테니 일도 더는 못할 것"이라며 "넉넉잡고 1~2년이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말했다.

개풍군 사람들이 두부공장 운영

장씨는 지금은 황해북도에 속해 있는 개풍군 남면 창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첫째 숙부는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했다. 농한기에는 아버지가 서울로 내려가 숙부를 도와 두부를 팔았다.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둘째 숙부와 함께 살던 장씨는 1946년 첫째 숙부가 있는 서울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장씨와 두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방 2개를 붙여놓은 숙부의 조그만 두부공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개풍군에서 농사를 짓던 마을 사람들은 농한기에 돈을 벌기 위해 숙부의 공장에 찾아와서 일을 돕기도 했다. 6·25때에는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는 "심지어 인민군이 콩을 갖다주고 두부를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장씨네 가족은 1951년 1·4 후퇴 때 피란을 떠났지만 몇 달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온 천연동은 떠나기 전과 사뭇 달랐다. 숙부의 공장에서 두부를 받아 팔고 기술을 배웠던 개풍군 출신 사람들이 숙부가 서울을 떠난 틈을 타 독립해 공장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생긴 6개 공장은 서로 경쟁을 했다. '이웃사촌'이 '경쟁자'가 된 셈이다.

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집들이 많은 돈의문 뉴타운 지역의 골목길. 두부장수 장수 환씨가 두부를 팔러 다니던 곳이다.

장씨도 경신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직접 숙부의 공장에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교남동 일대에는 '하꼬방'으로 불리는 소규모 판잣집이 많았다. 손수레를 끌고 골목을 누볐다. 골목이 좁아 수레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은 지게를 지고 두부 배달을 했다.

1963년 30살이 된 장씨는 숙부의 공장을 인수했다. 장씨의 공장은 한때 종업원 20명을 둘 정도로 호황이었다. 장씨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역, 남대문, 동대문 근방까지 두부 배달을 했다. "하루에 콩을 80㎏짜리 8가마를 사용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고 했다.

왕십리에 있는 중앙시장에서 콩을 구입해 두부를 만들었다. 국산콩 한 가마니(80㎏)로 두부 50판을 만들었다. 그는 "최근에는 미국산이나 중국산으로 두부를 만드는데 그렇게 하면 콩의 양에 비해 생산량이 적다"고 했다. 두부를 응고시키기 위해 쓰는 간수는 인천 소래포구나 부천에서 들여왔다. 달구지 장수가 갖다주는 간수를 쓰면 두부가 말랑말랑하면서 맛있었다. 불린 콩은 맷돌에 갈아서 끓일 준비를 했다. 6·25 전쟁 전에는 직접 손으로 맷돌을 돌려 콩을 갈았지만, 공장 규모가 커지면서 전기모터로 맷돌을 돌렸다.

포장 두부 생기면서 사업 기울어

인근에 생긴 두부공장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장씨의 두부공장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구파발과 불광동 등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도 교남동으로 진출해 과당경쟁이 됐기 때문이다. 장씨의 공장은 다른 공장들과 합병을 했다. 6개였던 두부공장이 1개로 줄어들었다. 기존의 재래식 두부제조방식도 압축기나 자동분쇄기를 이용하는 기계위주로 바뀌었다. 두부를 끓이기 위해 사용했던 연료도 나무장작과 석탄을 사용하다 벙커C유로 바뀌었다. 그는 "예전에는 기찻길에 떨어진 석탄을 주워와 쓰기도 했다"고 했다.

장씨는 1976년 홍제동에서 새 두부공장을 세웠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연거푸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장씨는 "60년대에는 두부가 집집마다 잘 팔렸지만, 점차 두부 소비량이 감소하고 대기업에서 만드는 포장 두부가 생기면서 사업이 기울었다"고 말했다.

현재 장씨는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받아 판다. 두부공장 사장에서 다시 두부 판매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가 왼손으로는 두부 모판을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종을 치며 골목길을 누비는 모습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터인 교남동과 돈의문 일대가 2003년에 뉴타운 사업지구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2014년까지 최고 70m 높이의 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장씨는 "교남동은 내가 두부를 만들어 팔아 자식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려왔던 삶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그의 두부장수 삶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발간한 '돈의문 뉴타운 보고서-도시민의 삶과 주거'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