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준 특파원, 하숙집에서 지진을 맞다
책장 무너지고 전등이 꺼졌다…
사람들은 손전등 들고 거리로… 이불·음식 등을 서로 나눠
부서진 고가도로 아래 자동차들이 구겨진 채 뒹굴었다. 무너진 카페에서 끌어낸 여자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남자도 보였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무너진 집 앞에 불을 피우고, 물과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돌봤다. 정부는 빠른 속도로 질서와 치안을 회복했다. 27일 오전 3시34분, 규모 8.8의 강력한 지진에 강타당한 칠레는 만 하루 만에 오뚝이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진원(震源)은 인구 90만의 칠레 제2 도시 콘셉시온에서 북쪽으로 약 115㎞ 떨어진 태평양 근해 해저였다. 지진은 2900㎞ 떨어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도 느껴질 만큼 강력했다. 미첼 바첼레트(Bachelet) 대통령은 28일 중부 지방에 '대재난 사태'를 선포했다. 칠레 국가재난국 카르멘 페르난데스(Fernandez) 국장은 "희생자 수는 300명을 넘어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50만명이 이재민이 됐고, 150만채의 건물이 파손됐으며, 200만명 이상이 지진 피해를 보았다.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와 폴리네시아 및 통가를 거친 뒤 태평양 연안 53개국에 쓰나미 경보를 울렸으나, 큰 피해 없이 경보는 해제됐다.
◆대재앙의 새벽=27일 새벽 마치 침대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위력이 아이티 지진의 500~1000배나 되는 대지진의 시작이었다. 거실의 책장이 쓰러졌고, 벽걸이 TV가 바닥으로 떨어질 듯 대롱대롱 매달렸다. 길 밖 자동차들의 보안장치가 삐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놀란 주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앰뷸런스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밝히던 전등도 곧 꺼졌다. 휴대전화, 인터넷, 전기까지 모두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손전등을 들고 거리로 쏟아졌다.
산티아고는 순식간에 마비됐다. 기자의 하숙집 주인은 급히 모두를 깨웠고,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복도로 모였다. 집은 밤새 떨렸고, 주방 기구가 부딪히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속출하는 지진 피해=진앙과 가까운 콘셉시온에서는 15층 건물이 주저앉아 100여명이 매몰, 구조작업이 계속됐다. 진앙에서 북동쪽으로 325㎞ 떨어진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 미술관 건물이 반파됐고, 2층짜리 미술관 주차장이 붕괴돼 차량 50대가 파괴됐다. 곳곳에서 아파트, 건물, 고가도로가 무너져 내렸다. AFP통신은 "산티아고 전체 건물들이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휘청거렸다"고 전했다. 칠레의 최대 항구인 발파라이소가 임시 폐쇄됐다. 지진으로 도시가 완파된 남부 일로카 주민 엘로이사 푸엔살리다(Fuenzali da)는 "땅이 흔들린 지 몇 분 안 돼 바닷물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목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울먹였다. 이 도시 시민들은 바닷물을 피해 맨발로 산을 올랐다. 규모 6.9의 지진 1회를 포함해 규모 4.9 이상만 120여 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생필품 사재기 드물어=날이 밝고 27일 오전 9시가 되자, 휴대전화 통화가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중심 프로비덴시아 지역의 교회 지붕이 마치 폭격을 맞은 듯 내려앉았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의 산티아고 시내는 엄청난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재앙에도 칠레 사람들은 놀라운 침착성을 발휘했다. 생필품 사재기도, 차를 끌고 대피한다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일도 없었다.
◆최대 피해 콘셉시온도 '평정'=정오에 기자는 한국대사관의 이용현 참사와 조민호 영사와 함께 진앙에서 가장 가까워 지진 사상자 대부분이 발생한 콘셉시온으로 출발했다. 이곳에 사는 10여명의 교민은 오전부터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다. 칠레의 지진에 대한 치밀한 대응은 고속도로에서도 확인됐다. 칠레 남쪽으로 이어지는 5번 고속도로에서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시속 100㎞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기자는 출발 8시간 만에 산티아고 남쪽 550㎞ 떨어진 콘셉시온에 도착했다. 콘셉시온은 암흑천지였다. 유선전화와 전기수도는 완전히 끊겼다. 유일하게 휴대전화만 일부 지역에서 터졌다. 하지만 도시는 놀랍도록 피해가 적었다. 시내에 상가와 일부 아파트가 무너져 내렸지만, 대부분의 집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서로 돕는 사람들=콘셉시온에 사는 박연수씨는 "평소에 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치안도 안정돼 있었다.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와서 차에서 잠을 자거나, 빈터로 가서 텐트를 쳤다. 오후 9시쯤 시내 중심가에서 만난 히메나 루이스(43)씨는 "오늘 새벽부터 나와 있는데 이웃들이 물을 나눠줘 아직 버틸 만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집에서 이불을 가져다 길거리의 이웃들에게 덮어줬다. 중심가 플라사 데 아르마스 광장 인근 가게에서 일부 시민이 화장지 등 생필품을 들고 나오는 모습도 봤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약탈에 동참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의하거나 말리는 모습이었다.
밤 11시, 이곳에 살고 있던 10여명의 한국인 중 마지막까지 연락이 되지 않던 이영표(67)씨 가족의 생사가 확인됐다. 이씨는 아파트 1층에서 촛불을 켜놓고 부인과 함께 있었다. 자연은 대재앙을 내렸지만, 칠레 사람들은 이에 지지 않았다.
중국 역사 뒤집은 '탕산 대지진'을 파헤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