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스위스 스타일이네."
지난 1월, 스위스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 각종 광고포스터가 전시된 벽면 앞에서 스위스 관광청에 근무하는 안드레아 자코멧(Jacomet)씨가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가리킨 건 뜻밖에도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Lufthansa)' 광고와 미국의 문구 회사 '포스트잇(Post-it)'의 포스터였다. 저게 왜 스위스 스타일이지?
"모두 스위스 글씨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스위스 디자인의 핵심은 바로 글씨에 있죠." 박물관 큐레이터 프랑수아(Francois)의 대답이다. 흔히 '스위스 스타일의 핵심'이라 부른다는 글씨체는 바로 '헬베티카(Helvetica)'. 이름부터 스위스 옛 이름 '헬베티아(Helvetia)'에서 따왔다.
◆스위스 스타일은 '글씨체'에서
스위스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공공표지판. 명확한 그림과 간결한 글씨체를 조합해 만든 최적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4개 국어를 공용언어로 쓰는 나라답게 대부분의 표지판엔 독일어·프랑스어·영어·이탈리아어를 혼재해서 쓰지만 복잡하단 느낌이 들지 않는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바인가르트(Weingart)는 "효과적인 글씨체를 사용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효과적인 글씨체란 다름 아닌 '헬베티카'. 1957년 스위스 디자이너 막스 미딩거가 디자인했다. 알파벳 글씨체에 흔히 장식으로 붙어 있는 선(세리프·Serif)을 모두 떼어내고, 지면을 정확한 비례로 나눠 그 위에 글씨를 새기는 게 특징이다. 시각적 조형성과 명확성을 극대화한 이 말끔한 글씨체는 곧 전 세계가 열광하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1960~1970년대 미국,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다국적 기업의 대부분이 로고를 헬베티카를 적용해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마이클 밴더빌(Vanderbyl)이 "헬베티카는 글씨체를 넘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최적의 디자인, 글씨에서 영감을
스위스 산업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은 이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의 세례를 받은 대표적인 분야다. 스위스 모든 철도역에 매달려 있는 시계를 재해석한 '몬데인(Mondaine)'. 심플한 폰트의 미학을 산업디자인에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멀리서도 몇시 몇분 몇초인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초침에 붉은색 원을 붙인 대신 숫자판을 과감히 없앴다. 가운데 박힌 상표 '몬데인'은 물론 헬베티카로 새겨넣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일체 배제한 것.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리처드 홀리스(Holis)는 "제품과 그래픽 디자인의 미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계해 결과물을 뽑아낸 대표적 사례"라고 평가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여권과 화폐 역시 헬베티카를 적용한 공공디자인. 여권은 스위스 26개 주를 상징하는 그래픽으로 장식, 오묘하지만 결코 복잡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인가르트는 "여권 등에 적용된 그래픽 디자인 역시 모두 글씨체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숱한 논쟁을 거듭하면서 창조한 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바인가르트, 프리드만 같은 이들이 기존 글씨체에 색채를 입히고 질감을 입히고 필름을 무질서하게 겹쳐 인쇄하는 실험을 하면서 풍부한 그래픽 디자인의 기초가 잡혔다는 것. 새로운 글씨체를 뽑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력이 결국 스위스의 디자인 품격을 바꿔놨다는 얘기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가방 브랜드 '프라이탁(Freitag)'은 이처럼 진화하는 스위스 글씨체의 현재(現在)를 온몸으로 웅변하는 브랜드다. 취리히 서부에 자리 잡은 '프라이탁' 본사엔 트럭 덮개로 사용됐던 천이 컨테이너 안에 가득 쌓여 있다. 이 재활용 천으로 만든 가방은 제멋대로 인쇄된 색채, 구겨진 질감, 아무렇게나 새겨진 글씨가 무늬처럼 사용된다. 가운데에 헬베티카로 새겨 넣은 글씨 로고 '프라이탁'은 화룡점정. 잘 만든 글씨 하나는 이렇게 스위스 디자인을 움직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