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스케이팅 국제대회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24일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 1만m 레이스. 이승훈(22·한국체대)은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코너에서 같은 레인의 아르옌 반 데 키에프트(네덜란드)를 제쳐버렸다. 스피드스케이팅은 두 선수의 '주행 코스'가 명확히 구분되는데, 이승훈이 상대 선수보다 한 바퀴 이상 앞서는 바람에 같은 레인에서 달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스피드스케이팅이 국기(國技)인 네덜란드 응원단조차 이승훈의 놀라운 레이스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승훈은 12분58초55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막판 세 바퀴'로 신기록 수립
이승훈은 역시 막판 스퍼트가 강했다. "마지막 세 바퀴에 미친 듯이 힘을 낸다"는 이승훈은 이날도 마지막 1200m 구간에서 놀라운 스피드를 보였다. 이승훈은 지난 14일 5000m에서도 괴력의 '막판 세 바퀴'로 은메달을 땄다.
8800m 지점을 지나면서 스피드를 끌어올린 이승훈은 9200~9600m 구간 기록(lap time)을 다시 30초대(30초48)로 당겼다. 마지막 바퀴는 30초29. 이날 레이스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이승훈은 9600m까지(12분22초46) 종전 올림픽 기록에 0.63초나 뒤졌다. 그러나 마지막 400m에서 놀라운 스퍼트로 2002년 수립된 올림픽 기록(12분58초92)을 0.37초 앞당겼다.
3.52초 차이로 은메달을 딴 이반 스코브레프(러시아)도 마지막 두 바퀴에서 스퍼트를 했지만, 이승훈의 구간 기록엔 미치지 못했다. 이 종목 세계기록(12분41초69) 보유자 스벤 크라머(네덜란드)는 9000m가 지나면서 뚜렷하게 스피드가 떨어졌고, 맨 마지막 바퀴는 32초대의 저조한 성적을 냈다.
◆더욱 업그레이드된 지구력
이변도 기적도 아니었다. 이승훈은 5000m 때보다 더욱 업그레이드된 지구력과 레이스 운영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첫 바퀴부터 맹렬하게 스케이팅하는 이승훈의 모습에 일부에서는 '오버 페이스(over pace)'를 걱정했다. 이승훈은 트랙 8바퀴(3200m)를 돌 때까지 400m 구간 기록을 30초대로 유지했다. 은메달을 딴 스코브레프는 1200m, 동메달리스트 밥 데 용(네덜란드)은 800m를 지나자마자 구간 기록이 31초대로 올라간 것과 비교하면 '폭주'나 다름없었다. 걱정과 달리 이승훈은 쉽게 지치지 않았다. 레이스 중반까지 31초 초반의 구간 기록을 유지한 이승훈은 오히려 막판 스퍼트를 위한 체력을 남겨두는 '여유'를 보였다. 레이스의 3분의 2가 끝난 6800m 지점에서 이승훈은 스코브레프보다 4.11초나 앞섰다. 쉽게 뒤집힐 차이가 아니었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 나윤수 송호대 교수는 "1만m 경기 경험이 3번에 불과한 이승훈의 진화가 놀라울 뿐이다. 스피드스케이팅에 완전히 적응하면 정말 무서운 선수가 될 것"이라고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