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두바이 부스탄 로타니 호텔에서 하마스 고위 간부를 암살한 다국적 암살단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사건 직전 호텔 감시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인자가 돼 있었다."

영국 켄트 출신의 폴 킬리(Keeley·42)는 16일 자신의 이름이 헤드라인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난달 19일 두바이에서 하마스(팔레스타인 정치조직) 고위 간부를 암살한 11명의 다국적 킬러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킬리는 재빨리 여권부터 확인했다. 여권은 무사했다. 그는 두바이를 방문한 적도, 여권을 잃어버린 적도 없었다. 영국 국적인 킬리는 15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집단농장)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는 "2년 동안 해외 여행을 한 적이 없다"며 "어떻게 내 여권이 국제 스파이 영화 같은 일에 쓰일 수 있는지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영국 외무부는 16일 "두바이 암살 사건 용의자들이 사용한 영국 여권 6개는 모두 실제 살아 있는 인물의 신상 정보와 여권을 도용해 정교하게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아일랜드와 독일 정부도 범행에 사용된 자국 여권이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여권을 도용당한 피해자들은 "여권을 분실한 적이 없다"며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됐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항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여권을 도용당한 사람 중 최소 7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이중국적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언론들은 이번 암살 사건의 배후로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를 지목하며 "증거가 드러날 경우 영국과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암살단원 11명 중 절반이 넘는 6명이 영국 여권을 위조했고, 아일랜드나 독일 위조 여권과 달리 실제 영국 시민의 신원을 도용했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17일 "모든 영국 시민의 신원이 국제 범죄에 악용될 위험에 처했는데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비판했다.

모사드는 해외 암살 임무 등에 자주 외국 여권을 위조해 외교 분쟁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1987년 모사드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사실을 폭로한 이스라엘 핵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Vanunu)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영국 여권을 위조한 것으로 드러나자 모사드의 영국 내 활동을 금지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2005년 자국 여권을 위조하려던 모사드 요원 2명을 체포했다. 모사드는 1997년 요르단에서 하마스 지도자 칼리드 메샬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캐나다 위조 여권을 사용해 캐나다 정부와도 외교 마찰을 빚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사드의 해외 암살 임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한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여권 위조에 대한 국제적 비난의 시선이 이스라엘로 쏠리자 당황하는 분위기다. '완벽한 암살 작전'이라고 은근히 칭송하던 이스라엘 언론들도 "우방국 여권 위조는 경솔했다"며 논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두바이 암살을 모사드가 주도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무모한 작전을 감행한) 모사드의 책임자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전직 모사드 요원은 "감시 카메라에 얼굴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행위 등으로 볼 때 모사드의 작전이 아닌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한편, 두바이 경찰은 17일 공항과 호텔 감시카메라(CCTV)에 얼굴이 노출된 암살 단원 11명 이외에도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암살 단원 6명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