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高手) 탄생

1980년 5월 연세대생 최재봉(崔宰鳳·50)이 제적됐다. 응용통계학과 2학년 때였다. 그의 이마에 찍힌 낙인이 어마어마했다. '반(反)정부 운동권', 서슬 퍼런 신군부(新軍部)에 의해서다. 사소한 데서 사람의 운명은 방향을 튼다.

최재봉이 그랬다. 별생각 없이 나간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자 이념서클에서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민중, 민주 같은 용어가 불쏘시개가 됐다. 선동가가 그 위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지식인의 책임은 부조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청춘은 열병(熱病)을 앓는 세대다. 보통 상처만 남기고 지나가지만 심하면 삶에 지장을 준다. 학교에서 쫓겨난 최재봉이 갈 곳은 군대뿐이었다. 2대 독자(獨子)여서 현역 입대를 면할 수 있었지만 병무청이 내세운 조건이 묘했다.

"아버지가 이북 출신인데 어떻게 독자인 걸 증명하겠느냐. 당시 주민 5명의 확인서를 가져오라!" 아버지 고향 평양 대동리에서 월남한 주민 5명을 찾으라는 명령이었다. 드넓은 세상에서 그건 바닷속 모래알 찾기처럼 보였다.

그 일을 대구에 사는 큰고모가 해냈다. 마침내 방위로 입대해 훈련을 마치던 날이었다. 성적 1~3등은 근무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훈련 성적 2등인 최재봉의 '입'이 또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1, 3등은 고향을 택하는데 "군 생활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 쑥 나온 것이다. 상사가 그 말을 듣자 별놈 다 보겠다는 듯 씩 웃더니 말했다. "송추!" 도봉산(道峰山) 뒤 오봉산에서 56훈련단 방위 최재봉은 매일 밤 근무를 했다.

대학 2학년 때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무협지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를 거쳐 게임에 도전하며 야설록은 살아왔다. 절벽에서 떨어져 동굴 속에서 무공 비급을 찾아 절대고수가 된 뒤 강호로 돌아오는 무협지 주인공의 삶과 자신이 비슷하다는 걸 그는 알까.

어느 날 밤(夜)에 흰 눈(雪)이 펑펑 내렸다. 갑자기 천지가 암녹색(暗綠色)으로 변했다. 그는 생각했다. "혹시 나중에 글을 쓰면 필명을 야설록으로 해야지!" 이렇게 무심코 정한 이름이 그의 팔자(八字)를 결정했다.

군 제대 후 그는 청계천 미싱골목으로 들어갔다. 무협지(武俠誌) 쓰는 작가가 된 것이다. 훗날 수백만명을 상상 속 강호(江湖)로 동반한 '무협 제왕' 야설록에게 주어진 것은 원고지와 모나미 볼펜뿐이었다. 1982년 5월이다.

4대 천왕

디자이너 앙드레김(본명 김봉남)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고 한다. 한 젊은이가 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앙 선생님…." 그걸 흉내내 야설록에게 물었다. "야 선생이 좋습니까, 최 선생이 낫습니까?" 그가 껄껄댔다.

야설록을 만나는 날 비가 왔다. 어딘가 매복했던 자객이 튀어나올 것 같은 날씨였다. 야설록은 1m80의 거구에 진짜 자객처럼 온통 검은색 옷차림을 한 채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글 쓸 때 속필(速筆)이라는 게 믿음이 갔다.

―야설록 외에 '서문하' '예춘추'라는 필명도 갖고 있었지요.

"몇 번 서문하, 예춘추로 작품을 내긴 했어요. 그때마다 독자들이 귀신같이 알아채요.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야설록으로만 쓰라'더군요. 제 글에 풍(風)이 있나 봐요."

―왜 무협지 작가는 사마(司馬), 와룡(臥龍) 같은 성이 많습니까. 중국에서도 찾기 힘든 희성(稀姓)인데.

"뭔가 멋있어 보이잖아요."

―청계천에 가면 누구나 무협지 작가가 됩니까.

"당시 무협지 시장은 대만 출신 화교(華僑)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책을 번역하는 수준이었으니까요. 테스트를 먼저 봐야지요. 무협지 용어나 구도를 시험 봐 소양(素養)을 판단하는 겁니다."

―왜 하필 무협지 작가가 되려 했나요.

"제 인생에서 이해 안 가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전공을 응용통계학으로 결정한 것과 무협지 작가가 된 건데, 고교 시절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고교시절 추억이라니.

"제가 우신고를 나왔습니다. 고 1때 재미삼아 시험지 노트에 무협지를 써봤어요. '철혈도(鐵血刀)'라고. 축구부와 럭비부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요. 그게 소문이 퍼지면서 2권을 안 쓰느냐는 채근도 받았어요. 어느 날 국어선생님께 그 책이 발각됐어요."

―당시 같으면 두들겨 맞았을 텐데.

"'빠따'를 20대쯤 맞고 책은 압수당했지요. 다음 날 선생님이 제게 와 슬그머니 묻더군요. '2권은 없느냐'고요."

―집에선 반대하지 않던가요.

"아버지는 생전에 제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소릴 하지 않았어요. 학교 공부를 하면 칭찬하고 무협지를 읽으면 '책 읽는구나'하고 좋아하셨지요. 대학 잘리고 아현동 고모님 댁에 얹혀살았는데 면목이 없어 청계천 집필실까지 걸어서 출퇴근했습니다. 돈을 벌기 전까지는요."

―첫 작품이 강호야우백팔뇌(江湖夜雨百八惱)였지요.

"그건 종전 무협지의 집대성 같은 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작품부터 주인공에게 성격을 부여했지요."

―그게 대박 친 강호묵검혈풍영(江湖默劍血風影)?

"첫 작품은 26일 만에 썼어요. 그리고 받은 돈이 8만원이었습니다. 강호묵검혈풍영을 쓰곤 350만원을 받았어요. 당시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이 45만원이던 시절이니 대단한 액수였지요. 주인공이 '능조운'이란 냉혈한이었는데 무협지 사상 최초로 주인공이 죽는 설정이었습니다."

―무협지의 주인공은 죽으면 안 됩니까.

"무협지의 공식은 해피엔딩이었어요. 능조운은 사파(邪派)에 속한 소위 '나쁜 놈'이었어요. 업보를 안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얘길 하니 편집자가 펄쩍 뛰더군요. 주인공을 왜 죽이냐고. 그래도 전 죽였어요."

―무협지에는 별의별 악당들이 다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이름이 멋있습니다. 그걸 다 직접 짓나요.

"제일 어려운 게 별호(別號)짓는 겁니다. 한번은 별호가 생각 안 나 끙끙대다 집에 돌아가 자는데 꿈에 별호를 짓고 있는 제가 보이는 거예요. 즉시 일어나 글을 썼어요. 정신을 집중하면 통하는 법이지요."

백수스승

단숨에 그는 무협지 마니아 사이에서 '4대 천왕'이란 평가를 받게 됐다. 4대 천왕은 야설록, 검궁인, 사마달, 금강이다. 무협지 시장은 그가 입성할 때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전국에 대본소만 6000개에 달할 때였다.

그는 무협지처럼 전설의 고수를 만났을까. 야설록은 '평생 백수(白手)로 2000년 타계한 선친(先親·최정석) 덕분'이라고 했다. 평양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전날까지 매일 소주 2병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고도 견딜 수 있나요.

"전 아버지에게 1원 한 장 받지 못했어요. 체력만 물려받았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술을 드시고도 다음 날 약수터에 빠지지 않고 갈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가만히 있던가요.

"어머니는 제가 두 살 때쯤 집을 나갔어요. 남편이 허구한 날 술을 마셔대니 배겨낼 수 있었겠어요?"

―그럼 누가 키운 겁니까.

"고모가 세 분 계셨는데 번갈아 돌봐줬지요. 왕십리 고모댁에 살 때였어요. 아버지는 1주일에 2~3번씩 절 광무극장, 성동극장, 계림극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그때 본 애정영화, 무협영화의 장면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합니다. 사무라이 소설을 좋아해 겨울밤에 책 빌리러 갈 때도 제 손을 잡고 다녔어요. 돌아올 때 호떡을 사다 놓고 아버지가 읽기 시작하면 전 기다리죠. 아버지가 2권을 읽으면 제가 1권을 받아 읽는 식으로."

―특이한 부자(父子)군요.

"제가 살던 집 옆에 작은 서점이 있었는데 당시 '새소년' 같은 잡지가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 침을 줄줄 흘리고 있으니 서점 주인 아저씨가 '표지를 꺾지 않을 자신 있으면 보고 가져오라'는 거예요. 몇 번 약속을 지키니 아예 서점에 와서 책을 읽는 걸 허락해주셨어요. 작은 저만의 도서관이 생긴 거지요. 보통 서점들이 아랫부분은 대중적인 것, 윗부분에 심오한 내용의 책을 꽂아 놓잖아요. 3~4년 동안 그 서점 책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전 초등학생 때 괴테와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었습니다.

―무협소설 작가를 4년 동안 하면서 숱한 화제작을 썼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요.

"1984년쯤 쓴 '녹수옥풍향(綠水玉風香)'입니다. 10번째 작품이었는데 그걸 읽은 독자가 이런 편지를 보내왔어요. '앞으로 당신을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5대 문호(文豪)의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돈도 많이 벌었겠네요.

"이상한 게 그 작품이 제일 안 팔렸어요. '어렵다' '삼국지처럼 복잡하다' '이게 무협지냐'는 평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당시 무협지는 화려하고 재미있고 기교는 있지만 철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중문학으로, 대본소에서나 빌려 읽는 책으로 폄하됐지요. 그걸 뛰어넘어 보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첫 실패였군요.

"그 뒤 두 달 동안 글을 한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군요. '어차피 대중이 원한다면 그 수준에 맞는 걸 쓰자'고요. 그 후속작이 '구대문파(九大門派)'였는데 그게 또 웃겨요. 20일 만에 다섯 권을 뚝딱 마치고 그냥 제멋대로 '1부 끝'이라고 했어요."

―그랬는데요?

"설악산으로 사흘 정도 놀러 갔는데 '빨리 올라오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대(大)히트를 친 거지요."

―9대문파가 진짜 있습니까.

"1920~30년대 무협지에는 곤륜파·소림사·아미파 정도만 나오지요. 후대 작가들이 무당파니 청성파니 하는 걸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면 다시 그 후배들이 그걸 인정하고 새로운 파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남해의 무인들은 칼을 잘 쓰니 '남해파'로 하자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9대문파니 12대문파가 생긴 겁니다."

―야설록의 무협지는 '이단(異端)'이란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무협지 주인공은 절벽에서 떨어지다 동굴을 찾습니다. 거기서 1000년 전의 기인(奇人)이 남긴 무공 비급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나와 협객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요. 절벽에 떨어질 때가 14~15세, 거기서 4~5년 무공을 연마하면 20대 약관(弱冠)이 돼 강호로 나오는데 빛도 없는 곳에서 해골과 있다 보면 세상에 대한 증오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런 사람이 협객이 되려면 몇번의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니 이단이란 소릴 들었지요. 다른 작가 사무실에서는 제 작품을 금서(禁書)로 정했어요."

원고지와 모나미 볼펜 한 자루로 전국 대본소를 주름잡던 야설록은“치우천황과 훤훤황제 신화로 서양 신화를 능가하는 게임을 개발해 세계를 제패하겠다”고 했다.

만화 점령

대본소 중심이 무협지에서 만화로 옮겨가고 있었다. 1987년 야설록은 대세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해 그는 무협만화로 유명한 황재와 일을 했다. 그가 만화시장으로 이동하자 일군(一群)의 무협작가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바야흐로 그림(만화가), 스토리 작가의 분업(分業) 시스템이 생긴 것이다. 그는 1989년 '서울 창작 패밀리'라는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무협작가 출신 70명이 그의 휘하에 모였다. 거기서 그는 모든 이의 글을 손봤다.

―1992년 서울 창작 패밀리가 분열했지요.

"전 '창작기획 무한'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전 '재미'를 구분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원고를 고치다 보면 의견 차이도 생기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황재 선생과는 어떻게 일을 한 겁니까.

"그분이 제 소설 '구대문파'를 보고 연락을 해왔어요. 저는 콘티를 짰는데, 쉽게 말해 칸을 구획하는 겁니다. 영화로 치면 연출을 제가 맡은 거지요. 1986년 결혼을 했는데 400만원씩 하던 무협지 원고료가 80만원까지 내려갔어요. 콘티 2권을 짜는데 하루 밖에 안 걸렸어요. 그러고도 56만원을 받았습니다. 노다지였어요."

―처음 해 본 콘티에 만족해하던가요?

"어느 날 황 선생님 댁을 미리 연락 드리지 않고 찾아간 적이 있어요. 선생이 빨간 사인펜으로 제가 짜드린 콘티를 막 긋다가 깜짝 놀라더군요. 제 콘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제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은 거지요."

―그러다 이현세씨와 만났지요.

"일화가 있어요. 제가 대부분의 만화가들과 함께 일했는데 허영만 선생과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현세씨 연락처를 알 길이 없었어요. 집에 허영만 선생 만화가 있었습니다. 뒤에 연락처가 있길래 무턱대고 전화해 '이현세씨 전화번호 좀 가르쳐달라'고 했지요. 얼마나 기분이 나쁘셨겠어요."

―그 길로 이현세를 찾아갔나요.

"'미로사냥'과 '아마겟돈' 두 작품을 만들어 등촌동 화실로 갔는데 마침 외국 출장 중이었습니다. 직원에게 두 작품을 맡기고 와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는데 보름 만에 연락이 왔어요. 만나자고."

―그와 많은 작품을 했는데 의견 충돌은 없었나요.

"이현세씨는 제 스토리의 120%를 소화해주는 작가입니다. '남벌(南伐)'을 할 때는 2년 반 동안 두 번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팩스로 스토리 보내주고 다음날 아침 만화를 확인하는 식이었어요. 그분과 많은 작품을 했습니다. '카론의 새벽' '머나먼 제국' '아마겟돈' '남벌'같은. 그러다 B팀과도 일을 하게 됐고요."

―B팀이라뇨?

"만화가들은 문하생을 키웁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독립을 시켜주는데 이현세씨 문하생이 이상세·박원빈·김일민 같은 분들이지요. 조명훈·조명운·조남기 같은 작가들도 문하생 출신들이고요. 자랑같지만 제가 그분들 출세작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어떤.

"박원빈 작가는 '제2의 킬러' '제10야드' 두 편으로 일류가 됐고요, 황성 작가는 황재 선생 문하생인데 어느 날 신촌의 맥줏집에서 만나보니 SF물만 그린대요. 제가 '전공이 무협인데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도와달라'더군요. 그래서 준 게 '혈견휴혈련환'입니다. 만화가는 일류작가가 되는 게 중요해요. 10년을 먹고살 수 있거든요."

―10년을?

"대본소 주인 머리에 '필'이 꽂히면 대본소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작가 책은 꼭 구입하거든요."

―전 무협만화는 이재학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분과는?

"이재학 선생 작품은 저도 좋아해요. 특히 추공(秋空) 시리즈를요. 그분에게는 박찬호라는 스토리 작가가 있었어요. 허영만 선생의 '타짜'를 쓴 분은 김세영씨고요. 그분들은 원래 만화가가 되려다 스토리 작가가 된 분들입니다. 스토리 작가는 만화에서 전향한 분들과 저 같은 무협지 작가 출신들로 양분됩니다."

―야 선생은 무협지의 대가인 대만의 김용과 스스로를 비교해본 적이 있습니까.

"와룡생은 대학교수였고 김용은 신문사 주필까지 지냈는데 그분은 자기 작품을 수없이 개작했습니다. 대중소설가라는 걸 평생 부끄럽게 여겼기에 판을 새로 낼 때마다 완성도를 높인 거지요. 저도 시간 나면 개작하고 싶어요. 제가 최고로 꼽는 작품은 '군협지(群俠誌)'입니다."

청춘불멸

그의 아들 셋은 아버지가 유명 '작가'인 것을 최근까지 몰랐다고 한다. 16세로 영국에 유학 중인 막내가 비행기에 오르며 아버지가 쓴 소설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아빠가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줄 몰랐는데…."

그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들과 술을 자주 마셔 "친구들과 있다가도 술 먹자고 하면 달려올 정도가 됐다"고 했다. 그런 열린 마음이 새 길을 열어줬다.

―2006년부터 '패(覇) 온라인게임'을 개발하고 있지요.

"올 2월에 테스트를 거친 뒤 4월쯤 출시됩니다."

―나이 오십에 온라인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가 뭔가요.

"게임을 한 건 1999년부터입니다. 그때 큰아들이 중2였는데 매일 문을 잠그고 뭔가를 하고 있어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컴퓨터 화면에 요란한 캐릭터들이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제가 '게임 폐인'이 됐지요."

―그러면서 게임시장의 전망을 보게 된 건가요.

"지금 게임시장의 주력이 몇살인지 아세요? 30대입니다. 그들은 사십, 오십, 육십대가 되도 게임을 할 겁니다. 그 뒤를 십대, 이십대들이 따르고요. 한중일(韓中日) 3개국의 게임시장만 20조원입니다. 전망이 밝지요. 제가 온라인 게임 개발에 나선 건 온라인에 맺힌 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온라인에 맺힌 한(恨)?

"지금까지 크게 세 번을 망했어요. 한 번이 '아마겟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때였습니다. 전 그 많은 이야기를 한 편에 담을 수 없으니 세 편으로 만들자고 했어요. 첫 편이 실패하면 2편은 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제 말이 먹혀들지 않았어요. 유럽 여행을 다녀와 보니 일이 벌써 진척돼 있었어요. 그 애니메이션 시사회 때 아이들과 갔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나더군요. 중간까지 보다 나왔어요. 육홍타라는 스포츠지 만화전문기자가 있는데 절 보고 '씩' 웃으며 '소름 끼치죠?'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창피했는지. 게다가 '원작 야설록'이란 자막은 왜 그리 큰지…."

―두 번째는요?

"포털사이트에서 만화를 무료로 볼 수 있게 한 겁니다. 대본소가 그때 망했어요. 때맞춰 만화시장이 개방돼 일본 만화가 몰려 왔어요. 10%이던 점유율이 80%까지 올라가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지요. 그때 제가 '야디'라는 만화 주간지까지 창간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대형 트럭으로 창간호를 발송하고 신문을 보니 '국가 부도'라는 시커먼 제목이 박혀 있었습니다. IMF를 맞은 거죠. 삼중(三重)타격을 받고 몇억을 날렸습니다."

―세 번째는요?

"사이버문화대학을 만들려 했습니다. 이문열 선생도 교수로 모시고 6개 학과를 설치하려 했습니다. 망원동에 교사(校舍)로 쓸 부지 700평을 사들이고 시설까지 갖췄습니다. 교육부에서 가(假)인가를 내줘 다 된 일인 줄 알았는데 끝내 허가가 나오지 않더군요. 당시 온라인대학은 연세대·경희대 같은 곳들이 컨소시엄으로 했는데 저만 개인이 했거든요. 교육부 관리들이 이미 내부적으로 선을 그어놓고 있었대요. '만화 스토리 작가가 무슨 온라인대학이냐'고. 2001년 봄 눈물을 머금고 가인가 포기서를 써주고 일을 접었습니다."

―지금 개발 중인 게임은 무슨 내용입니까.

"자꾸 무협과 연결시키는데 실은 판타지입니다. 서양 신화의 완성품을 전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으로 봅니다. 주로 북구(北歐)신화 위주지요. 우리는 왜 그런 게 없을까 생각하다 치우천황과 훤훤황제 신화에 주목하게 된 겁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치우가 한국인의 시조처럼 등장했지만 중국인의 원조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중국인은 자기 민족의 시조(始祖)를 염제·황제(훤훤황제)·치우로 봅니다. 그렇지만 얼마 안 됐어요. 치우와 훤훤의 전쟁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1권에 나옵니다. 나중에 훤훤이 이족(夷族) 치우를 사로잡아 사지를 자른다는 판타지적인 내용이지요. 우리 환단고기니 규원사화니 단기고사 같은 책들에는 '훤훤이 치우를 사로잡은 뒤 풀어준다'고 돼 있지요."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한(漢) 고조 유방은 싸움터에 나갈 때마다 치우에게 제를 올렸습니다. 우리 뚝섬에도 '독신사'라는 사당이 있었어요. 이순신 장군이 북방 여진족과 싸우러 가기에 앞서 거기서 제를 올렸지요. 사기의 기록처럼 치우가 전쟁에 졌다면 어떻게 훗날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겠습니까. 치우는 단군보다 300년이 앞선 4700년 전 인물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런 치우를 무시하다 1993년에야 산둥성(山東省)에 삼조당(三祖堂)을 만들고 자기들 역사에 편입시킵니다. 그게 바로 동북공정의 출발점이지요."

―환단고기니 하는 책들은 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판정 나지 않았나요?

"저도 그 책들은 참고자료로만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 역사 가운데 단군(檀君)을 전설로 보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치우보다 300년 늦게 태어난 단군이 어떻게 곰의 자식이란 말인가요. 기자(箕子)조선으로 우리 역사를 축소시킨 것도 그렇고요. 지금 우리 사학계는 일제 때 우리 역사를 축소시킨 학자들의 제자들이 맥을 잇고 있지요."

―패 온라인은 그런 내용을 담은 건가요.

"동양적인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겁니다. 제가 게임을 딱 세 개만 만들 겁니다. 지금 것은 과거, 두 번째 것은 현재, 세 번째 것은 미래를 주제로요. 현재에 관한 게임은 이슬람과 미국을 포함한 유럽, 아시아의 충돌이 소재가 될 겁니다. 미래는 우주로 범위가 넓어질 것이고요."

대학 제적에서 시작된 대화가 무협과 만화, 신화를 거쳐 우주로 넓어졌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는 나이가 들면 호미를 들고 발굴을 하러 다닐 것이라고 했다. 무슨 발굴이냐고 묻자 다시 야설록의 얼굴이 환해졌다.

"백제 동성왕이 북위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남제서(南齊書)에 나옵니다. 4회 이상 10만명을 동원한 싸움이었다고 해요. 믿어지지 않죠? 그 큰 중원의 나라가 백제에. 그때 동성왕이 지은 임유각을 제가 찾아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