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숨을 못 쉬어요. 빨리 출동하세요."

지난달 22일 밤 10시 49분 47초 서울 강남소방서. 강남구 신사동에 사는 박순이(86) 할머니가 호흡곤란에 빠졌다는 출동 지령이 서울소방방재센터를 거쳐 들어왔다.

재빨리 출동하는 이형국 소방교를 따라 기자도 구급차에 올랐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했다. 출동 2분 후쯤 이 소방교는 신고자인 박 할머니 아들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환자 상태가 어떻습니까. 중풍 환자라고요?"

전화기 너머로 "빨리 와주세요"라는 신고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 상태를 확인한 이 소방교는 구급차 속도를 높였다.

11일 오후 3시쯤 긴급출동한 서울 종로소방서 119구급차가 안국동 일대 도로에서 비켜주지 않는 차량들 때문에 멈춰 서 있다. 심정지 환자 등 촌각을 다투는 구급 환자를 살리려면‘골든타임’4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양보 없는 시민의식 탓에 이를 달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밤 10시 53분, SM3 승용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 앞으로 차선을 바꾸며 마치 가로막기라도 하듯 유유히 들어왔다. 지체된 구급차가 차선을 바꾸며 속도를 더 높이려 했지만 3분 뒤에는 청담사거리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져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은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구급차 앞에서 느긋하게 지나갔다. 젊은 여성 두 명은 재미있는 대화라도 나눈 듯 깔깔 웃으며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넜다.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발했지만 구급차 앞으로 택시와 일반 승용차들이 1~2분 간격으로 들어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옆으로 길을 터주는 차량은 없었다. 결국 구급차는 밤 11시 3분에야 박 할머니집에 당도했다. 신고한 지 13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심정지(心停止)나 호흡곤란 상황에서 최대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골든타임' 4분을 이미 3배나 넘겨버렸다.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급차 앞을 가로막는 차량이 너무 얄밉죠."

박 할머니집으로 뛰어들어 가며 이 소방교는 한숨을 쉬었다. 선진국에서는 소방차나 구급차가 출동하면 주변 차량이 알아서 길 한쪽으로 비켜서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양보의 미덕을 가진 차량을 찾기 힘들었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작년 구급차가 출동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전국 평균 시간은 8분18초다. 지역별로는 대전이 5분26초로 가장 빨랐고, 경북은 11분12초가 걸렸다. 국내에서는 법이나 규칙에 '응급차가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소방전술론 등에 따르면 심정지·기도폐쇄 등 응급환자나 일반 주택 화재현장에 이르는 시간이 4~5분을 넘기면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내 가족이 구급차에 타고 있다는 심정으로 길을 터 주세요"

본지가 소방방재청과 함께 전국 1366명의 일선 소방관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구급·구조 출동 때 가장 어려운 점으로 소방관들은 ▲중앙분리대 때문에 차량 이동 불편(311명·22.8%) ▲좁은 골목길(291명·21.3%) ▲길 터주지 않는 도로 문화(274명·20.1%)를 비슷한 정도로 꼽았다. 출동할 때 일반 차량이 길을 얼마나 잘 터주냐는 질문에는 '거의 안 터준다' '안 터주는 편' 등 부정적인 응답이 전체의 64%인 875명에 이르렀다.

하루 중 일반 차량이 가장 양보하지 않는 때는 퇴근시간이었고, 다음이 출근시간이었다. 오후 5~8시에 양보를 가장 안 한다고 응답한 소방관이 574명(42%)으로 가장 많았고, 오전 8~10시는 275명(20.1%)이었다.

"사이렌을 울리고 라이트를 켜도 요지부동인 차량으로 인해 애가 타들어가는 심정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고 다가오면 내 가족이 촌각을 다투는 긴급상황에 빠졌다는 심정으로 양보를 해줬으면 합니다." 설문조사에 응한 서울 지역 한 소방관은 이런 의견을 남겼다.

양보를 하지 않는 차량 탓에 구급차들이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구급차는 신호를 무시하고 달릴 경우도 있는데, 이를 감안하지 않고 '나는 신호를 따른다'며 멈춰 서지 않는 차량 때문에 사고가 나는 것이다. 소방방재청은 "119구급차의 교통사고는 2005년 108건, 2006년 130건, 2007년 96건, 2008년 149건 등으로 매년 100건을 넘을 때가 많다"고 밝혔다.

◆헌법 위에 떼법, 20대 여성의 "쥐 좀 잡아주세요" 신고

사소한 119 신고를 해결하느라 시간을 뺏겨 정작 중요한 출동을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지난 1월 28일 밤 11시 32분 서울소방방재센터에 황당한 119 신고가 들어왔다. "집에 쥐 한 마리가 들어왔으니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건 20대 여성은 막무가내로 빨리 출동해 달라 했고, 센터는 종로소방서에 출동 지령을 내리며 '헌법 위에 떼법'이란 애교스러운 코멘트를 달았다. 출동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사건이지만 신고자가 떼를 쓰니 출동해 주라는 의미였다.

쥐 한 마리 때문에 화재진압용 차량을 끌고 출동한 연건119안전센터 조원건 소방위는 "갓난아이를 기르던 20대 후반 젊은 주부가 욕실 하수구로 쥐가 들어왔다고 신고한 것으로, 5분 만에 몽둥이로 쥐를 때려잡고 돌아왔다"며 "하루에도 사소한 신고가 2~3건은 들어와, 정작 중요한 출동에는 시간을 지체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설문 조사에서 '취객 신고나 동물 구조 등 사소한 119 신고로 인해 정작 중요한 긴급 출동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나'라는 질문에 '매번 혹은 자주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이 595명(43.6%)이나 됐다. 또 허위 혹은 장난 신고로 '허탕 출동'한 빈도도 10번 중 2~4번 된다는 응답이 44.8%나 됐다.

박연수 소방방재청장은 "구급차량에 길을 터주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라고 봐야 한다"며 "시민들이 119구급차는 '위급환자용'이란 생각을 늘 가슴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