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강동구 성내2동의 한 연립주택에 검은 반코트에 곱슬머리 단발을 한 양복용(52)씨가 방문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세상 빛을 본 지 11개월 된 갓난아기 서은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문쪽으로 기어갔다. 양씨는 방 2개짜리(43㎡·13평)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서 반갑게 고개를 든 서은이와 눈을 마주쳤다.
"집에 오면 가장 먼저 아기와 눈맞춤을 해요. 시각장애인 엄마가 못해주는 것을 대신 해주는 겁니다."
양씨는 제일 먼저 아기 몸 상태를 살피며 입으로 '생중계'를 시작했다. "우리 아기 몸에 두드러기도 없고, 눈도 정상이고, 아픈 데도 없구나."
"변 색깔은 괜찮아요?" 옆에서 귀 기울이던 시각장애 1급인 엄마 최지연(33)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그제야 엄마 얼굴이 밝아졌다.
양씨는 여성 장애인들의 양육을 돕는 홈헬퍼(home helper)다.
양씨가 아기를 목욕시키는 동안 옆에서 수건을 들고 앉아 있던 최씨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없을 때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아이 몸을 닦았다"며 "이제 아주머니가 목욕을 시켜주니 안심이 되고 '어디를 씻긴다'는 '생중계'를 들으며 우리 딸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곤 한다"고 했다.
네살 때 뇌수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최씨는 다니던 교회에서 오영기(32)씨를 만나 2008년 결혼했다. 남편 오씨도 네살 때 고열로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2급)이다. 이 부부가 아이를 가졌을 때 주위에서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울 거냐"는 걱정이 많았다. 최씨는 "겉으로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막상 속으로는 '내가 과연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기는 작년 3월 6일에 태어났고, 만만치 않은 육아생활이 시작됐다.
'눈이 안 보이는 나 대신 아이를 보살펴 줄 사람은 없을까.' 최씨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팔이 불편한 어머니(56)에게 양육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무료로 산후조리 해주고 아기도 돌봐주는 '홈헬퍼 제도'다. 최씨는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을 통해 홈헬퍼를 신청했고, 이후 홈헬퍼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세 번 찾아오고 있다.
또 다른 홈헬퍼 채영숙(61)씨는 이날 서울 강북구 번동의 한 주공아파트에서 지적장애 3급 고선화(30)씨와 네 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네 살짜리 지연이가 그림책을 들고 엄마 대신 채씨에게 뛰어왔다. "이게 뭐야?" 채씨는 "이건 사~과~야. 그럼 이 옆에 있는 이건 또 뭐지?"라며 아이들과 그림책 놀이를 했다. 정상보다 지능이 낮은 엄마 대신 아이들 교육을 도와주는 것이다. 채씨는 "아이가 하나하나 사물을 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다"고 말했다.
홈헬퍼는 장애인 부모들이 어떤 장애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 이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237명으로, 지체장애인 34.7%, 시각장애인 26%, 지적장애인 20%, 청각장애인 8% 등이다. 한영희 서울시 장애인복지과장은 "홈헬퍼는 아이 부모가 시각장애인이면 아이들 몸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고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확인하며, 부모가 청각장애인이면 아이들에게 동화 읽어주기나 말하기 교육을, 지적장애인이면 주로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 1급 최정혜(28)씨의 경우 작년 홈헬퍼의 도움으로 아들 수빈(1)이의 백내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최씨는 "홈헬퍼 아주머니가 '아기 눈이 이상하다'는 말을 안 해줬으면 아들도 우리처럼 시각장애인이 될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한가족 같다고 해도 홈헬퍼들이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 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주기 힘든 것을 바로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홈헬퍼들은 서울시로부터 시간당 6000원, 한달 동안 활동하면 50만원 정도 받는다. 홈헬퍼 채영숙씨는 "돈만 바라보고는 못하는 일"이라며 "장애인 부모를 가진 아이를 돌보고 커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늦둥이를 낳아 기르는 느낌"이라고 했다.
☞ 홈헬퍼(home helper)
시각·청각·지체장애 등을 겪는 여성 장애인들의 임신과 출산, 육아 양육을 지원하는 도우미. 2004년부터 16개 시·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10세 미만 자녀가 있고, 가구소득이 전국 평균보다 낮은 여성 장애인 가정을 일주일에 최대 4일 방문, 자녀 양육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