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6세인 회사원 A씨는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생 시절 세 차례나 연예기획사에서 소위 '연습생' 생활을 했다. 여성 그룹 멤버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 그가 가장 거북하게 느꼈던 것은 성적(性的) 이미지 극대화를 원하는 기획사의 과도한 집착. "기획사에서는 7명 멤버 중 3명에게 '넌 무조건 남자들을 홀릴 수 있는 섹시 콘셉트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그 3명이 당시 모두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황당했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일본의 선정적인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기묘한 교태를 따라 하게 했어요. 봉춤 배우는 건 기본이었고요. 그게 그 친구들의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A씨는 결국 연예인 꿈을 접고 대학을 마친 후 취직했다.

선정성을 앞세워 대중의 눈길을 잡으려는 여성 그룹들의 행태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멤버들 중 상당수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주변을 더욱 안쓰럽게 하고 있다. 사회에서 아직 독자적 판단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받아들여지는 어린 아이들이 성적인 시각으로 소비되는 '상품'으로 조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소녀그룹 포미닛의 리더 현아가 관능적인 안무를 보여주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그는 2010년 현재도 미성년자인 92년생이다.

한 관계자는 "이들 중 일부는 성적 매력을 앞세워 자신의 연예계 생활을 돌봐줄 사람, 즉 '스폰서'를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2008년 말부터 중장년 남성들이 소녀 그룹의 적극적인 팬층을 형성하면서 선정성 경쟁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지마켓에 따르면, 작년 12월 열린 소녀시대의 콘서트에서 30대 이상의 티켓 구매율은 29%로 10대(35%)와 20대(36%) 못지않았다. 남녀 비율은 각각 70%와 30%였다. 최근 인터넷 만화가 윤서인씨가 소녀시대를 성적으로 희화화한 만화를 올려 논란 끝에 사과를 했던 사태는 국내 중장년 남성들 사이에 소녀 그룹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윤씨는 당시 "소녀시대의 노래를 항상 듣는 것은 물론 리패키징 CD까지 싹 구입할 정도로 열혈 팬"이라며 "제가 부족하고 서툰 탓에 만화가 불쾌하게 보인 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본지가 현재 활동 중인 18개 소녀그룹의 멤버들 생년월일을 확인해본 결과 미성년자 숫자는 29명. 멤버들을 모두 합친 숫자가 85명이니 34%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진짜 '소녀'들인 셈이다. 그중 최근 활발하게 대중을 만나고 있는 '포미닛'은 5명 멤버 전부가 미성년자다. 최근 솔로곡 '체인지'의 뮤직비디오에서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관능적인 골반 춤을 추며 인기를 얻고 있는 이 팀의 리더 현아는 92년생. 이 뮤직비디오는 KBS로부터 '19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이 밖에도 f(X)는 5명 중 4명, 카라는 5명 중 3명이 미성년자다.

이를 두고 여성계에서는 나이 어린 여성에 대한 성 상품화가 지나치다며 비판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을 역임한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는 "남성 중심의 연예 권력이 미성년자의 성적 매력을 찾아내 착취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며 "어린 나이에 자신의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법부터 배우며 자란 아이들이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정근 미디어위원장은 "대중문화계에서 무섭게 확산되는 소녀 그룹들의 성 상품화 바람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다"며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행동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소녀그룹 붐은 일본이 간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소녀그룹 열풍을 시작으로 미소녀들을 성인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 대상으로 소비하는 대중문화 상품이 무차별적으로 확산됐다. 96년 열린 '어린이 성매매 금지 세계 총회'에서는 "전세계 아동 포르노물의 80%가 일본에서 생산된다"는 지적도 나왔었다. 일본에서는 '로리콘(소아 성애를 뜻하는 롤리타 콤플렉스의 일본식 발음)' 콘텐츠가 지금도 공공연히 유통되고 있다. 관련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이 쏟아지고 있으며 전문 쇼핑몰도 있다. 최근에는 미취학 아동들의 비키니 사진과 동영상이 출시돼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3~4년 전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아 소녀 그룹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결국 이렇게 성적 코드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측하고 있었다"며 "부모의 관리 감독도 없이 기획사의 전략과 판단에 의해 미성년자들이 성적인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NHK 기무라 요이치로 서울 PD 특파원은 "요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한국의 소녀 그룹들이 일본의 비슷한 그룹들보다 더 과감한 성적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그간 일본에서도 이런 상황을 두고 성 상품화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고 말했다.

▲28일자 A8면 '소녀 벗기는 사회(中)' 기사의 '소녀그룹들의 미성년자 멤버들' 사진설명에서 '권소현'은 '허가윤', '허가윤'은 '김현아'로, 그룹 포미닛의 리더는 남지현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