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면 고민이 따른다. 제대로 하려면 둘 다는 못 가져가기에. 누구를 막론하고 어느 순간 갈림길에 서게 마련이다. 김기훈도 피해가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를 놨다. 그러나 그것은 한시적 결정이었다. 쇼트트랙으로 세계무대를 평정한 그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책을 잡았고, 심리학 박사학위까지 손에 넣었다. 지금은 국가대표팀 감독과 울산과학대 사회체육과 교수를 겸하고 있다. 그에게 공부와 운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일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쉽게 얻은 결과는 아니다. 과연 그는 어떤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까.
▶놀라운 발견
꼬맹이 때 아랫도리가 약했다.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면 다리가 아파 징징거렸고, 어머니가 꼭꼭 주물러 줘야 겨우 잠이 들었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스케이팅을 떠올렸다. 여섯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대문 실내링크에 갔다. 꽁무니 뺄까 봐 그랬는지 부모님도 함께 등록했다. 집이 왕십리라 다니기도 괜찮은 편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난데없이 코치가 유니폼을 사 들고 와 부모님과 마주 앉았다.
"1년 탄 애들보다 나아요. 선수로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은 뜻밖의 제안에 적잖이 놀랐지만, 어차피 시작했으니 석 달만 지켜보기로 했다. 무섭게 실력이 늘어 가자 석 달은 금세 '초등학교까지만'으로 바뀌었다. 스케이트 명문 리라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재미를 더했고, 리라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놀라운 재주를 보였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다리 주무르는 일도 없어졌다.
"사실은 추워서 타기 싫었어요. 시키니까 탄 거지. 그래도 이런저런 대회에 나가 1등도 하고 하니까 재밌더라고요."
배재중 입학과 함께 공부를 1순위로 놨고, 스케이트는 겨울에만 탔다. 아버지 생각이었다. 상위 10%에 들 정도로 공부도 곧잘 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도 타고난 재주는 어쩔 수 없었다. 공부만 하다가 대회에 나가도 메달은 다 따왔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돌연 특기자 신청을 했다. 공부 때문에 경기고에 보내고 싶었으나 학군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담임선생님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1학기 때까지 말 없다가 갑자기 그런다고요. 배신감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경기고 가서도 겨울에만 훈련하고 경기에 나갔어요."
▶사서 한 고생
고교 시절 한국에 쇼트트랙이 들어왔다. 어차피 공부하자고 맘먹어서 그런지 별 관심이 없었다.
3학년이 되던 85년 봄에 사상 첫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코치가 대뜸 나가 보라고 했다.
그냥 한번 뛰어 보자는 마음으로 나섰다가 달랑 다섯 명 뽑는 데 턱걸이했다. 하물며 날 구조나 구두 높이가 다른 일반 스케이트를 신고 뛰었는데도.
"국가대표가 되자마자 체육과학연구원에 가서 체력 테스트를 받았는데 '보통사람' 수준으로 나오더라고요. 유연성만 빼고요. 슬쩍 오기가 생겨 훈련에 열을 올렸죠."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면서 체계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운동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는 했다.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세 시간 반 뛰면 정규훈련은 끝났다. 그렇다고 저녁 시간을 비워두기엔 뭔가 허전했다. 저녁 먹고 쉬다가 7시 반쯤 운동장으로 나간다.
400m 트랙 바깥은 경사진 둑이었다. 그 경사면을 스케이팅 자세를 취한 채 우전방 45도 각도로 뛰어오른다. 한 발로만 깡충깡충. 다 오르면 좌전방 45도 각도로 내려와 곧장 다시 오른다. 이렇게 쉬지 않고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반대 발로 또 한 바퀴 돈다.
트랙 바깥 둑인 데다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니 한 바퀴가 1㎞는 족히 됐다.
새우처럼 허리를 꺾어 자세를 최대한 낮춘 상태에서 평지도 아닌 경사면을, 그것도 외발로 뛰어 오르내린다.... 생각만 해도 장딴지며, 허벅지가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 훈련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했다. 자그마치 10년을.
"발목 다칠 위험이 있다고 다들 꺼리는 운동이었죠. 구식 운동법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경사면 뛰기야말로 실전에서 제대로 힘쓸 수 있는 운동이었어요."
그게 다가 아니다. 두 바퀴 돌고 나면 바로 뒤 불암산으로 올라간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공터에 아버지가 땅을 파서 만든 '스케이트 점프' 훈련장이 있었다.
시설은 간단했다. 그냥 물이 흐르지 않는 폭 1m30의 도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케이팅 자세를 취한 뒤 그 도랑을 좌우로 펄쩍펄쩍 뛰어 건너는 게 바로 스케이트 점프 훈련이다. 기본이 1000개다. 물론 쉬지 않고다. 중간에 서너 차례 고비가 온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고, 다리가 굳어 안 움직이려 한다. 그래도 어금니 물고 뛰다 보면 다리가 다시 풀린다. 무슨 일 있어도 1000개는 채웠다.
"고비 다 넘기고 1000개를 채우면 흥이 생깁니다. 무아지경에 빠지죠. 100개만 더, 100개만 더 하다가 1500개까지 한 적도 있어요."
여름이면 산 모기떼가 덤벼 애도 많이 먹었다. 선수촌을 나올 때까지 매일 밤 거기서 땀을 쏟았다.
▶나이트클럽에 가면
선수촌에서 외출 나오는 토요일 밤에는 주로 나이트클럽에 갔다. 술-담배도 안 하고 춤도 못 췄지만,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은 그때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우유나 콜라로 맞췄다. 어쩌다 무대로 끌려나가면 멋쩍게 서서 박수나 쳐주고 그랬다. 대신 고막을 찢는 강한 노래는 스트레스 푸는 데 도움이 됐다. 한데 그나마도 양껏 즐기지는 못했다. 스스로 정해 둔 훈련 스케줄 때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클럽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달밤의 체조'를 시작한다. 바이크도 타고, 스케이팅 보드도 타고.... 1시간 동안 구슬땀을 쏟은 뒤 샤워하고 다시 클럽으로 가면 밤 11시 정도. 그때부터 한두 시간 친구들과 더 어울린다. 친구들이 볼 때는 정말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다들 기분 좋게 협조했다.
늘 그랬다. 97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 설날에도 차례 지내자마자 링크로 달려갔고, 휴가도 훈련으로 채웠다.
"재밌어서 한 건 아닙니다. 최고가 안 되면 별 볼일 없다는 얘기에, 1등 못 하면 인생이 불행할 수도 있다는 얘기에, 그리고 하면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습니다."
대표팀 훈련 때도 항상 얼음판에 5분 먼저 들어갔다. 혼자 두어 바퀴 돌며 몸 풀고 있으면 동료들이 합류했다. 계산된 부지런이었다. 달랑 5분이지만 한 달이면 60바퀴, 1년이면 730바퀴였다. 경쟁자들보다 한 바퀴라도 더 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절한 레이스
89년 영국 솔리헐 세계선수권대회에선 언론으로부터 '아이언 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자신만만했던 1500m에서 캐나다 선수에게 밀려 2위로 내려앉으면서 신화는 시작됐다.
오기 바람에 애당초 포기했던 500m에서 무리하다 사고를 당했다. 레이스 도중 넘어진 북한 김창환의 스케이트 날에 오른발목 안쪽 복사뼈 위를 찍힌 것이다. 주최 측 의료진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얼음으로 피부를 냉각시킨 뒤 생살을 네 바늘 떴다. 마취제를 쓰면 백발백중 도핑테스트에 걸릴 것이기에 도리 없었다.
다음날엔 1000m 레이스가 펼쳐졌다. 두 종목을 망친 터라 다쳤다고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경기 앞두고 휴지를 돌돌 말아 양쪽 어금니로 물었습니다. 통증이 심해 참고 뛰어보려고요."
다친 부위가 여러모로 난감했다. 하필 스케이트 구두 끝이 닿는 자리였다. 게다가 코너 돌 때 오른발목이 안으로 꺾이니 꿰맨 자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도 결과는 우승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신발을 벗으니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실밥이 뜯어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국 언론들이 철인이라고 호들갑을 떨 만도 했다.
▶수술대 오르다
귀국과 함께 시련이 닥쳤다.
상처는 아물었는데 운동만 하면 멍이 생겼다. 혈액순환이 안 되는 줄만 알고 부항도 뜨고, 죽은 피도 뽑으면서 훈련을 계속했다. 기록은 좋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내 스케이팅'은 나오질 않았다.
병원에 가도 '후유증'이라며 약만 한 보따리씩 안길 뿐이었다. 근 10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한데 아시안게임(90년 삿포로)이 다가오면서 아무래도 찜찜해 친분이 있던 하권익 경찰병원장을 찾아갔다.
하 원장은 침대에 눕히더니 손가락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수직으로 밀었다 놨다 했다. 그러더니 한마디 했다. "끊어졌다. 수술하자." 인대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그 고생을 했던 것이다. 오전에 들어가 해거름에 나온 굉장히 긴 수술이었다. 연결한 인대가 다시 끊어질까 봐 발목을 안쪽으로 꺾은 채 허벅지까지 깁스했다. 자다가 발목이 펴지면 다시 끊어질 수 있다는 얘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발가락을 잡은 채 밤을 꼬박 새웠다.
이틀 지나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고, 10일 만에 퇴원해 목발을 짚은 채로 선수촌에 들어갔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동료들이 제 기록을 다 깨버렸어요. 마음이 급해 마냥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선수촌에선 목발 버리고 왼발로만 뛰어다녔다. 쇼트트랙 선수에게는 그것도 중요한 운동이었다. 얼음판에 서지 못해도 링크를 찾아 머릿속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6주 만에 깁스를 푸니 종아리가 손목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시안게임까지는 한 달 남짓. 물리치료 하기도 빠듯했다. 그 몸으로 삿포로 간다고 했더니 하 박사가 웃었다.
거기서 기적을 일으켰다. 1000m, 1500m, 5000m 계주 3관왕! 사람이 아니었다.
▶쇼트트랙 선구자
시간과 거리를 줄이기 위해 늘 고민하고 도전했다.
트랙 한 바퀴는 111.125m. 가장 빨리 돌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거리를 타는 것이 중요하다. 온갖 기술로 원심력에 최대한 역행해야 한다.
국가대표가 된 다음 해던가.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일반인들과 뒤섞여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코너를 빨리 돌기 위한 고민을 한창 하던 때였다.
거기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스케이팅이 서툰 꼬맹이가 두 발을 교차하며 코너 도는 게 어려웠는지 오른발로만 도는 것이었다. 저거 재밌겠다 싶어 연습해 보니 매우 효과적이었다.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1500m에서 그 얄궂은 '외다리 주법'을 선보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 주법은 금세 유행이 되었다.
뒤이어 선보인 게 거리를 최소화하는 '호리병 주법'이다. 보통은 원을 그리며 트랙을 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고정관념을 깼다. 코너를 돌고 직전 주로에서 트랙 안쪽으로 휘어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다시 트랙을 끼고 코너를 도는 것이다. 주로를 연결하면 땅콩 모양이 된다. 쇼트트랙에서는 트랙 안으로 들어가도 반칙이 아니다.
이 주법으로 성적을 내자 또 모방 선수가 부쩍 늘었다. 코너 돌 때 왼발 놓기가 무섭게 오른발을 옮겨놓는 '원-투 스텝'도 개발했다. 원심력을 최소화하며 근거리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기술이다.
최고의 작품은 아버지와 함께 만든 '곡선 날'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스케이트 날을 구부려 보자고 했다. 주로 곡선을 달리니 날을 구부리면 타기가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숱한 실험 끝에 곧은 날보다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날부터 집에서는 날 가는 소리 외에 망치질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그때 만든 곡선 날도 일반화됐다. 엄청난 발명품이었던 셈이다.
진짜 사나이
씨름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운동하는 아들이 달갑잖았다.
1등만 기억하는 풍토도 그랬지만,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른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장사 김성률과 전국체전 결승에서 겨뤘을 정도로 대단한 씨름꾼이었다. 불도저 체인을 끌고 다녔을 만큼 훈련도 독하게 했단다.
두꺼운 가슴 탓에 X선 촬영으로 폐가 나오지 않아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자 돈을 써서 군에 간 사나이 중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환갑이 지나서도 한 손으로 저를 들어 벽에 붙였을 정도로 장사예요. 그러니 운동 대충할 생각은 아예 못 했죠."
86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1500m에서 동메달을 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더는 갈 데가 없다고 생각해라. 스케이트 제대로 못 타면 인생도 잘못된다는 각오로 해라."
그날 새긴 각오는 은퇴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유일한 실책
아버지의 정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국가대표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오전 6시부터 두 시간 훈련하고 나면 아버지가 선수촌으로 와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듣기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선수촌으로 복귀했다. 집안이 넉넉해 승용차가 있었고, 아버지가 바쁘면 운전기사가 그 코스를 대신 돌았다.
이 고달픈 행보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다. 세월이 지나 아버지는 무릎을 쳤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 공부를 했더라면...."
아버지의 유일한 실책이었다. 예습-복습 없이 듣는 걸로만 공부가 될 리 만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적극성이 은퇴 후 자연스럽게 책을 잡게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세계를 평정한 구식 훈련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가마니 두 개에 모래를 가득 채워 오셨다. 곧장 지하실로 옮기더니 1m20 간격으로 나란히 세웠다. 일종의 '스케이트 점프'용 운동기구였다.
허리를 숙여 자세를 취하고는 얼음 지치듯 양쪽 가마니를 반복적으로 뛰어 건너는 훈련이다.
지하실은 천장이 낮았다. 힘들다고 허리 펴면 영락없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게 돼 있었다. 도저히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구조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는 가마니 사이에 구정물이 든 빨간 고무 대야까지 갖다 놓았다. 아무리 지쳐도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한물간 비과학적 운동법이었지만, 아버지는 그걸 고집했다. 그게 최고라고 여겼다.
"음악 시간에 쓰는 메트로놈을 앞에 두고 그 녀석이 움직이는 데 맞춰 1초에 한 번씩 뛰었습니다. 딴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 오로지 그놈만 보고 뛰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느다란 대나무 회초리를 들고 옆에 서 계시다가 자세가 틀린 부위를 때렸다.
그 따끔한 느낌을 몸이 기억하면서 자세는 완벽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한번은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꿈에 스케이트를 타는데 자세가 영 안 잡히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숙소 1층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탕에는 탕이 2개 있었고, 사우나실이 하나 있었다. 누가 보면 자다 말고 미쳤다고 할까 봐 사우나실에만 불을 켠 채 그 자세를 연습했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선천적인 X형 다리를 펴려고 무릎 사이에 베개를 끼운 채 허벅다리와 발목에 압박붕대를 감고 자기도 했다. 잠을 설치기도 하고 아침이면 붕대도 다 풀어졌지만, 한동안 고집스럽게 계속했다. 몸으로 하여금 코너 자세를 기억하게 하려고 왼어깨를 살짝 들고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포갠 채 엎드려 잔 적도 많다.
"스케이팅에 좋다는 건 다했습니다. 아무래도 편한 자세가 아니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자죠. 그래도 참아 가며 하고 또 했어요."
그런 노력 덕분일까. 쇼트트랙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15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선 달랑 두 개 걸린 금메달(1000m, 5000m 계주)을 다 차지했다. 한국의 동계올림픽 출전 44년 만에 거둔 사상 첫 금메달이자, 올림픽 쇼트트랙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그해 미국 덴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싹쓸이 우승으로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500m, 1000m, 1500m, 3000m 계주, 개인종합까지 5관왕. 그 대회에 걸려 있던 금메달은 다 가져왔다. 전 종목에 걸쳐 예선부터 결선까지 모두 1등이었다. 500m와 1000m 각 4회, 1500m 3회, 3000m 계주 1회 등 총 12회 레이스를 전부 1위로 장식했다. 퍼펙트 우승은 ISU(국제빙상연맹)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마지막 레이스인 3000m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로 결승 테이프를 끊자 관중은 기립박수로 얼음판 영웅에게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