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도쿄특파원

일본이 전후(戰後) 최대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꼭 50년 전이다. 미·일 개정 안보조약이 서명된 1960년 1월 19일부터 발효된 6월 23일까지 반년이었다. 이른바 '안보 투쟁' 시기다. 일본을 친미 자유 진영에 포함시키려는 권력에 대해 반미·친공의 좌파와 중립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대다수 지식인이 들고일어난 사건이다.

역사를 읽으면 장면이 손에 잡힐 듯하다. 오만한 정부, 선동하는 언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른 채 거리로 나온 청춘, 유혈극…. 수년 전 서울과 50년 전 도쿄는 반세기란 시간 차에도 수많은 장면이 중첩된다.

도쿄는 국회가 안보조약을 비준한 5월 20일을 기점으로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날 국회에 경찰 500명이 돌입했다. 의장실을 봉쇄한 야당 의원들을 한 명씩 끌어낸 뒤 의장을 빼냈다. 조약은 밀실에서 수분 만에 비준됐다.

강행 처리를 주도한 것은 기시 총리였다. 그는 6월 일본을 방문하는 미 대통령에게 비준서를 선물하고 싶었다. 시간에 쫓겨 의회를 설득하지 않고 다수로 밀어붙였다.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

기시는 옳았다. 미·일 동맹은 현명했고, 국민 다수는 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만했다. 선동이 민심에 먹혀들 만큼 오만했다. 수년 전 서울에서 방송이 했던 일을 50년 전 도쿄에선 좌파 잡지가 맡았다. '국회로 가라. 북에선 홋카이도, 남에선 규슈로부터. 손에 청원서를 들고 국회를 감싸라. 끊이지 않는 군중의 행렬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정치적 힘이다.'(세카이·世界 1960년 5월호)

청원서를 든 수만명이 도쿄로 몰려들었다. 6월 10일 하네다공항에서 시위대에 포위된 미 대통령 보좌관을 미 해병대가 헬기로 구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일 뒤엔 국회 앞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 여대생이 압사하고 589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성난 시위대가 죽창을 들고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청와대 앞의 군중 그대로다. 기시는 '아침이슬'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자위대 동원을 타진했지만 각료들이 반대했다. 군중은 피를 보겠다는 기세였다.

이때 역사를 극적으로 돌린 일이 일어났다. 6월 17일 아침 7개 중앙신문이 동시에 공동선언문을 게재했다. 다음날 23개 지방지가 같은 선언문을 실었다. 일본 언론사에 영원히 각인될 '폭력을 배제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는 전대미문의 공동 사설이었다.

'15일 밤 일어난 유혈사건은 의회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통한사(痛恨事)였다. 야당은 솔선해 국회로 돌아와 사태 수습에 협력하라. 그것이 국민의 뜻이 아닌가.' 침묵하는 다수의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장면이 달라진다. 서울은 신문사에 돌과 오물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도쿄의 시위는 동력을 상실했다. 기시는 조약이 발효된 23일 총리직을 던졌다. 그는 함께 밤을 지새운 동생 사토(훗날 총리)에게 말했다. "개관사정(蓋棺事定)." 관뚜껑을 닫은 뒤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그의 관뚜껑이 닫힌 것은 1987년이다. 그 후 역사는 1960년을 소중하게 기억한다. 안보조약은 일본 현대사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더 값진 성과는 신문이, 국민이 의회의 가치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선동은 그 후에도 있었다. 하지만 민심의 동조는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국회가 국민의 갈등을 수렴하고, 국민은 국회의 결정을 수용하는 의회주의의 본질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일본은 50년 전 그렇게 선진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