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풍토병인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 아니라 악몽 같은 황열병을 앓았다.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10일 오전(한국 시각)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가진 잠비아와의 새해 첫 평가전에서 2대4로 완패했다. 경기 양상은 완패를 넘어 "이것이 대표팀 경기 맞나" 싶을 정도로 지리멸렬했다.
개인기·탄력·파워를 갖춘 아프리카 팀이 조직력까지 겸했을 때 그 파괴력을 실감케 한 경기였다. 초반부터 밀리던 한국은 전반 6분 카통고에, 14분 칼라바에 릴레이골을 내줬다. 한국은 34분 염기훈의 프리킥이 골대를 맞고 나오자 김정우가 한 골을 만회했지만 후반 12분 차망가, 28분 키부타의 골이 터지며 주저앉았다. 구자철이 후반 37분에 한 골을 추가했을 뿐이다. 한국이 한 경기에 4골을 내준 것은 2004년 7월 31일 이란과의 아시안컵 8강전(3대4 패배) 이후 5년6개월 만이다.
■총체적인 조직력 붕괴
전문가들은 잠비아전을 앞두고 "아프리카의 개인기를 막으려면 조직력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한국팀의 조직력은 실종 상태였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조직력이 흩어진 상황에서 일대일이 강한 상대를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경기"라고 평했다. 한 위원은 공격의 경우 공 처리 박자가 늦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K리그 수준만 생각하고 슈팅을 시도해 템포가 빠른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공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잠비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단지 수비진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조직력의 붕괴 탓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공격 최전방과 미드필드에서부터 상대의 스피드를 전혀 저지하지 못하고 뚫려 한국의 4백 수비가 무너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얘기다. 박성화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협력 수비(2~3명이 상대 공격수를 둘러싸는 수비)가 가능해지려면 한국 최전방 공격수와 미드필더진이 상대 공격의 스피드를 늦춰줘야 한다"며 "상대의 공이 정확하고 빠르게 한국 위험지역으로 전달되는 상황에선 협력 수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고지 적응전략 전면 재검토해야
경기가 열린 요하네스버그는 해발 1700m가 넘는 고지대이다. 한국은 6월 17일 이곳에서 잠비아 이상의 경기력을 갖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본선 B조 2차전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어이없을 정도로 고지 환경에 취약했다. 패스는 하염없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헤딩을 위해 점프했다가 공이 얼굴에 정면으로 맞는 경우까지 나왔다.
자연 '고지대 적응 준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연구에 따르면 고지대 적응에는 3~4주가 필요하며, 그 효과는 2~3주간 지속된다. 신체 산소 섭취량을 극대화해야 하는 마라톤 선수들이 고지대 훈련을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을 한 달 앞둔 5월 오스트리아 고지대에서 전지훈련을 갖는다는 막연한 계획만 갖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인 연구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고지대에서 열린 1983년 멕시코 청소년선수권(한국 4강 진출) 당시 선수로 뛰었던 신연호 단국대 감독은 "고지대는 잘 적응하고 들어가도 힘들 수밖에 없다"며 "과학적인 현지 적응 여부가 이번 월드컵 결과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선수들의 정신 상태와 적응력도 비판대에 올랐다. 똑같은 고지대 조건에서도 잠비아는 여유만만하게 경기를 풀어갔다. 르나르 잠비아 감독은 경기 후 "프로라면 어떤 상황이든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현실적인 수준 차이 인정해야"
잠비아는 3일 전인 7일엔 한국의 월드컵 B조 상대인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을 치러 0대0으로 비겼다. 잠비아를 가운데 놓고 보면 나이지리아의 '간접 우위'가 확인된 셈이다. 한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이 3차례나 무승부를 기록했던 북한은 지난해 11월 잠비아와 친선경기에서 1대4로 완패했다. 한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축구의 현실적인 수준 차이를 인정하고 팀을 새롭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