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월 개인전(국제갤러리)을 앞두고 서울 연희동 집에서 막 나온 화가 박미나(37)는 몸에서 물감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그는 "3월 전시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다음 전시를 위한 아이디어가 동시에 떠올라 미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솟구쳐 주체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젊은 미술가 상당수가 영상이나 설치 작업으로 달려가는 동안, 박미나는 회화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그는 "내가 미국에 유학할 시절에도 설치미술이 대세였고, 회화를 택한 학생들은 원시인으로 불렸다"고 말했다. 박미나는 "영상 작업도 흥미를 느끼지만 회화는 아직도 가능성이 많은 장르"라고 말했다.
박미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미술 선생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그리고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 미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하면서 오랜 소원을 풀었다. 그는 "유학 시절은 하고 싶었던 미술을 맘껏 할 수 있고, 친구들이 열심히 하는 걸 보면서 거의 매일 흥분 상태에 있었다"고 말했다.
박미나는 1990년대 중반 시작한 색상회화로 차츰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고, 2003년 '오렌지 페인팅'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렌지'가 들어 있는 모든 물감을 사들인 뒤, 튜브에서 짜 캔버스 위에 그대로 칠했다. 작품 제작 당시 팔리고 있는 물감만 사용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단순해 보이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작가가 물감을 사용할 때 주체적인 창작활동 같지만, 실제로는 물감 회사가 제안한 물감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회사에서 나온 동일 제품일지라도 실제 작업에 발랐을 때 조금씩 다른 것을 보여줘 '같지만 같지 않다'는 주제의식을 드러냈다.
이처럼 박미나의 회화는 작가가 해석해내는 주관과 객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파트에서 자란 아스팔트 키드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대한 반응을 제 방식대로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박미나는 수집·연구·분석하는 '유사 과학자'의 모습마저 보여준다.
'딩벳회화'는 박미나의 회화가 보다 입체적인 층위를 갖게 됐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딩벳회화는 알파벳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있는 일종의 그림서체인 딩벳폰트를 이용한다. 예를 들어 'a'라고 할 때 '집'의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과 같다. 박미나는 인터넷에서 딩벳폰트를 내려받은 뒤 끌리는 이미지로 먼저 레이아웃을 그린다. 다음에는 이미지에 글자를 대입시킨 뒤 이미지를 분류해 마치 이야기가 있는 것같이 꾸민다. 완성된 화면을 보면 선명하고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집이나 휴대폰, 새 같은 친근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글자를 대입시켜 보면 욕이거나 아무 이야기가 없을 때도 있다. 처음 봤을 때 귀엽고 친근하게 느껴졌던 이미지가 속을 들여다보면 욕이거나 허탕인 것이다.
작가의 유희 같아 보이지만 바탕에는 이를 구성하는 작가의 논리와 규칙이 있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일상을 꿰뚫는 작가의 통찰이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화된 현대생활에서 보이는 단절과 블랙 유머, 스토리에 대한 갈망 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박미나의 회화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즐거움과 흥미를 준다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작년 잭슨 홍과 보여준 공동전시 《라마라마딩동》에서 박미나의 이런 특징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디자이너인 잭슨 홍과 합작한 작품에서 박미나의 제작 의도는 다른 장르에도 저항감 없이 수용됐고, 시너지 효과를 보았다.
한때 스스로 '너무 평범해 고민이었다'는 박미나는 밥숟가락만 놓으면 바로 작업실로 달려갈 수 있도록 주택 지하에 작업실을 갖춰놓을 정도로 작품 욕심이 많다. 박미나는 "2월 스페인 전시에 이어 3월 국내 전시가 연이어 있어 긴장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면서도 "죽을 때까지 불러주는 전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