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으로 창이 난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이슈에게 부인 라셸이 물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우리 앞집에 사는 사무엘한테 내일 아침 1000루블을 돌려줘야 하는데 돈이 없어." 라셸은 창문을 열고 사무엘을 불렀다. "우리 남편 모이슈 알죠?" "알지." "내일 1000루블을 받아야 한단 것도 알겠네요?" "당연하지! 내일 돌려줘야 해요. 정말 필요해요." "그런데 말이에요, 내일 돌려주지 못할 거예요. 지금 돈이 없거든요."

라셸은 창을 닫고 자리에 누워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자요. 잠 못 자는 것은 그일 테니까."(138~139쪽·피에르노엘 지로의 《약속의 교역: 근대금융 소론》 중에서)

사무엘이 모이슈에 대해 갖고 있는 채권은 미래의 어느 날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약속일 뿐 이 약속이 지켜질 거란 확신을 담고 있진 않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돈을 빌린 사람은 발 뻗고 자지만 돈을 빌려준 사람은 정작 자신이 내놓은 돈의 덫에 걸려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경제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학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이처럼 "경제학이 풀어야 할 문제는 복잡한 수학공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풍자적 시선으로 저자는 역사학·인류학·심리학을 아우르는 갖가지 인용을 덧붙여 자본주의가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왜 모순으로 가득 찼는지를 까발린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수록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시간을 희소하게 만든다. 빨리 달릴수록 삶의 진정한 가치를 성찰할 시간은 줄어들고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저자는 그래서 "삶이 피곤하고 즐거움은 적고 고통이 가득해 죽음이 오히려 구원으로 주어진다면 긴 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프로이트의 우울한 반문을 화두(話頭)로 잡고 이를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삶의 유일한 목표가 돈을 모으기 위해 저축하는 것일 뿐 삶과 예술을 누릴 줄 모른다면 그것은 경멸해도 마땅하다고 설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