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들로부터 ‘고운 선이 부각되어 보이고 기품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춤을 가진 무용수’라는 최고의 호평을 들으며 손짓 하나 호흡 하나로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던 무용수 옹경일(38)을 기억하는가. 그녀는 국립무용단의 대표작 ‘백제의 향’ ‘신라의 빛’ ‘춤 춘향’에서 연달아 여주인공 역을 맡아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로 활약했었다. 하지만 2002년 ‘춤 춘향’을 끝으로 더 이상 무대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더 나은 무용수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안무 연수를 받고 1년 후 돌아오겠다며 떠났던 그녀는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굵은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리던 LA의 토요일 오후, 도심의 작은 카페에서 옹경일을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공연 활동 이외에 '옹댄스 컴패니'와 '옹댄스 스쿨' 두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죠."

최근 이사도라 던컨상을 수상한 옹경일씨.

무용수로서 최고의 시점에 돌연 미국으로 가야 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국립 무용단에서의 마지막 작품이 '춤 춘향'이었어요.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열여섯 춘향이 역을 맡았죠. 내 모든 것을 다 춘향이에게 걸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하고 준비했어요. 그렇게 온몸과 영혼을 춘향이에게 던지다시피 공연을 한 후, 저는 쓰러졌어요. 몸의 기가 빠졌다고 할까요? 말 그대로 '피가 마르도록' 춤에 모든 것을 바쳤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돼 많은 생각을 했죠.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내 춤을 위해서, 작품을 위해서 바람직한 길인가'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4세 때 무용을 시작해 서른이 넘는 나이까지 무용 말고는 한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외골수였습니다. 춘향 역을 맡아서 연습할 때 내가 생각하는 춘향이가 있기에 스스로 춤을 만들며 처음으로 안무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안무를 시작한 게 외국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늦은 나이였죠.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아직 무용수와 안무가의 선이 명확하고, 무용수로서는 그 선을 넘을 수 없었기에 더 늦기 전에 무용수보다 안무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한국무용을 하는 사람이 굳이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내에서는 여러모로 홀로서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죠. 참고로 제 석사 논문 주제가 '춤의 대중화 방안 모색'이었어요. 한국에서의 대중화도 중요하지만,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그들의 눈에 비쳐지는 한국 춤이 어떤지, 반대로 다른 나라의 춤은 어떤지 직접 경험하고 싶었어요."

주변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안무를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사람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며, 모든 사람과 환경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스스로를 가둔 주변의 환경부터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죠. 바깥으로 나가야만 가능한 일이었고요. 부모님과 교수님들, 단장님께도 1년 예정으로 다녀오겠다고 말씀 드리고 어렵게 허락 받았어요."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적응해 나갔나요. "문화와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풀어나가는 게 힘들었어요. 그런데 말은 못해도 내 춤을 본 사람들과는 춤을 매개체로 대화가 되기 시작했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좋았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어요. 친구 따라 파티에 갔다가 수영장 풀에 빠진 거죠. 제가 무용 말고는 해본 게 정말 없다 보니 수영도 전혀 못하거든요. 물에서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다가 가라앉았는데, 말 못할 공포가 선을 넘어설 정도가 되니까 어느 순간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어요. 그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누군가가 나를 끄집어내고 인공호흡을 하니까 제가 깨어나서 아이처럼 울더래요. 그리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때부터 저는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어요. 그 후에 모든 게 새로웠지요. 생소함보다는 호기심이 생겼고, 그간 가지고 있던 나의 모습 대신 새로운 나를 알게 되고…. 그러고 나니까 주변과 환경이 내 앞에서 하나씩 껍질을 벗는 느낌이었지요."

미국에서 '한국무용'으로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운데요. 전반적으로 미국에서의 한국무용이나 한국문화의 위상은 어느 정도 된다고 봅니까. "일단 제가 활동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지역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제 무용을 본 많은 미국인들이 '인도나 아프리카, 일본 춤은 볼 기회가 많은데 한국 춤은 볼 기회조차 없었다. 우리에게 너희 춤을 볼 기회를 달라. 너는 한국 무용계의 대통령이다'라고까지 말하며 호감을 나타냈어요. 반면 어떤 한국 동포들은 제 춤을 보고 '그게 한국무용이에요?'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춤이 전무했다는 소리예요. 다행인 것은 근래 한국 춤에 대한 미국인들의 기대치가 무척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부강해지니까 당연한 결과예요. 그런데 문화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안돼요. 문화원과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의 권위 있는 무용제 '이사도라 던컨 시상식'에서 옹경일씨의 작품이 '단체상'을 수상했는데요. "이사도라 던컨상(이지스상)은 샌프란시스코 출신이었던 현대무용의 창시자 이사도라 던컨을 기념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시에서 매년 상을 주는 거예요. 물론 제가 상을 겨냥해 작품을 만든 건 아니었어요. 한국의 북춤을 토대로 여러가지를 고안해 단체 북춤을 만들었는데 다행히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저는 이사도라 던컨상 심사위원들이 와서 보고간 줄도 몰랐는데, 뜻밖에 상을 받게 되어 무척 영광이었죠."

미국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부분을 물론 빼놓을 수 없어요. 고액의 레슨비를 받으며 무용을 가르쳤고, 국립단체로부터 안정적 지원을 받으며 부모님 밑에서만 살다가 이곳에 오니 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했어요. 제 이름으로 된 '옹댄스 스쿨'과 '옹댄스 컴패니'를 경영하다 보니 경영난에도 부딪혀야 했지요. 한국에서 춤만 출 때는 상상도 못했는데, 무용하는 사람은 경영 마인드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게 되었어요. 사람 상대 하는 법, 공연 올리는 모든 행정적인 과정들과 책임들, 무용수와 스태프 구하는 일들, 그밖에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제 손에 달려 있어요. 또 힘들었던 건 무릎수술이었어요. 심각한 상태였죠. 의사는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라고 했는데 그때는 다시 춤을 출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걷게 되고, 조금씩 뛸 수도 있게 되었어요. 다시 춤을 출 수 있게 되면서 늘 겸손함을 갖게 됐죠."

1년 예정과 달리 7년째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무엇보다 제가 맡은 단체에 대한 책임감이 크죠.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좋은 무대와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미국까지 와서 사서 고생이냐고요. 그래도 그간 공연요청이 무척 많았어요. 저는 제 춤을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달려갔어요. 주위로부터 '국립 무용단 주연 출신이 어떻게 그런 보잘것없는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냐' '너 하나로 국립 무용단의 위상이 떨어진다'는 책망까지 들었지만 개의치 않아요. 저는 무대의 질을 따지기 전에 일단 '한국의 춤'을 이곳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훨씬 커요. 만약 여기서 힘들다고 포기해버리고 당장의 안락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곳도 저에게 편한 곳이 아닐 거라 생각해요. 저는 아직도 여기에서 더 배우고 경험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한국에 가서 알고 있던 인맥에 의지해서 큰 도전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사는 것은 의미 없어요."

미국에서의 예술활동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무용인 살풀이도 1920년에 발표된 창작춤이었어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우리에게 전통으로 불려졌을 뿐 처음 시작은 창작이었던 거예요. 제 꿈은 저의 창작 춤이 100년 뒤에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춤으로 남아서 후손들이 계속 그 춤을 추게 되는 거예요. 저는 창작 춤을 추고 있지만 모든 것이 전통 춤에 기반하고 있어요. 전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창작을 하고 한국을 소개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하는 활동이 한국을 바로 알리고, 동시에 제가 만드는 춤이 한국 춤의 일부가 되어 오래 남게 되길 바라요."

오랜 시간 빗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 주변에 머무르는 따듯하고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 힘들 때에는 눈물에 밥을 비벼 먹었지만 그래도 춤이 있어 행복하다는 옹경일. 일본이나 중국, 인도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우리 춤의 예술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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