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십 년 전만 해도요, 전주엔 다방이 1000개는 됐어요. 큰 빌딩 1층은 모조리 다방 차지였거든. 예전에 대류빌딩이라고 유명한 건물이 있었는데, 거긴 다방이 세 개나 있었다니까. 여기 사람들, 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꼭 마셨으니까…. 여기가 예인(藝人)의 도시 아닙니까. "

"그 많던 다방이 언제부터 자취를 감춘 거죠?"

"글쎄요, 한 십년 전부터? 근데 지금 찾아간다는 다방, 아직 있는 것 맞아요? 없어지지 않았나?"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에 전북 전주에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택시 기사 김요술(62)씨는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에 있는 삼양다방에 가자"는 주문에 이렇게 걱정을 늘어놨다.

"없어졌어도 진작에 없어졌을 텐데"라던 택시 기사 말과는 달리, '삼양다방'은 경원동 홍지서림 사거리에 옹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1952년 문을 연 이후 자리를 옮긴 적 없는 다방.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꼽힌다. 새빨간 붓글씨체로 새겨 넣은 '다방'이란 푯말. 문 앞엔 한때 배달 커피를 실어날랐을 자전거 두 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 있다.

삼양다방은 여전히 옛날식이다. 커피 찻잔은 대야에 담아둔 더운 물에 데워서 내놓고, 커피는 낡은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갈아서 만든다.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오후에 나와 신문을 뒤적이거나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낸다. 한때 문화 사랑방을 자처했던 다방의 현주소다.

"댕댕…" 문을 열자 문틀에 매달린 종이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붉은색 인조가죽을 씌운 소파와 고동색 나무테이블이 늘어선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50~60대로 보이는 손님 두어명이 띄엄띄엄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렇게 바랜 공중전화 아래 놓인 소파에 앉았다. 주인 이춘자(58)씨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뭐로 드릴까?"

이씨는 삼양다방의 새 주인이다. 이전 주인들과 연고는 없다. 10년 전 이곳 찻집을 인수했다. 이전 주인이 40년 넘게 운영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창업자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그에게 물려받은 건 이 찻집과 집기, 찻잔을 미리 더운물에 넣어 데우는 식의 낡은 노하우 정도다. 이씨는 "나보단 이곳 단골손님들이 삼양다방 역사를 더 잘 안다"고 말했다.

전주 원로화가 모임 '계절회' 이용재(81) 회장은 이곳 단골 중 한 사람이다. 이 회장은 "전주에 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나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듣곤 했다"며 "1970년대 무렵엔 이곳에 오면 항상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들을 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커피 설탕 프림을 2:2:1 비율로 섞어 내놓는'다방 커피'.

1960~70년대는 전국 곳곳에서 음악다방이 번성을 누리던 시절이다. 다방은 LP를 걸어놓고 클래식 또는 대중가요를 틀었고, 전문 DJ가 있는 곳도 있었다. 경남 진해 '흑백다방',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 등도 사랑방처럼 사람들이 모여 음악을 듣고 시를 읽다 가는 곳 중 하나였다.

삼양다방 역시 슈베르트와 쇼팽을 틀어주는 곳으로 이름을 알렸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쌍화차를 시켜놓고 클래식 음악을 두세 시간씩 듣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화가들은 이곳에서 종종 전시회를 열곤 했다. 전시 공간이라곤 다방이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누구든 소위 개인전시회를 열고 싶다면 다방부터 찾아다녀야 했다. 전시회가 열리면, 관객들은 그림을 구경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운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다.

이젠 아무도 쓰지 않는 배달 자전거가 서 있는 다방 입구. 한때 번창했던 삼양다방은 이제 옹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다방 곳곳엔 몇몇 화가나 사진가가 남겨놓고 간 작품들이 걸려 있다. '계절회' 회원 일부는 본인 이야기가 실린 신문 기사를 오려 스크랩한 자료를 이곳 다방에 두고 보관하기도 했다. "다른 화가들이 서로 읽어보면서 내심 경쟁을 하곤 했으니까…." 이 회장의 말이다.

다방은 곧 '문화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작가 조정래의 '한강'을 보면 서민들이 커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거 커피란 것이 요상시런 물건이드랑께. 서울서넌 커피맛을 알아야 문화인 축에 들고, 커피 맛을 알아야 인생을 아는 것으로 친담스로?' 전주에 한때 다방이 번성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1976년 커피 자판기가 등장하면서 다방 수요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차별화된 커피 맛을 선보이지 않고선 다방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79년 개업한 동숭동 '난다랑'을 시작으로 다방은 서서히 '커피 전문점'으로 변신을 시도했고, 전통적인 모습 그대로를 고집하던 찻집들은 그렇게 하나 둘 자취를 감췄다.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와 백설탕, 프림을 2대 2대 1 비율로 섞은 커피 가격은 2000원. 1960년대 30~40원 하던 가격이 그 사이 50배가량 뛰었다. 서울 시내 커피 가격이 30원에서 2008년 평균 3364원으로 뛰어올라 112배나 오른 것에 비하면 물론 매우 싼 값이다(통계청).

이씨는 "내가 가게를 인수할 때만 해도 원두커피가 메뉴에 없었는데, 지금은 2000원에 판다"고 말했다. 연필로 가격을 써넣은 메뉴판은 벽에 액자처럼 걸려 있다. 몇 번이고 가격을 지우개로 지우고 고쳐 쓴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몇몇 손님들은 "단골이니 깎아달라"며 커피를 마신 후에 1000원씩만 내고 가기도 한다. 이씨는 "이곳에서 장사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계산대 위엔 정체 모를 물건이 있었다. 흡사 계란 판처럼 곳곳이 동그랗게 옴폭 파인 플라스틱판. 그 위엔 조각조각 잘라놓은 화투가 흩어져 있었다. "이건 옛날식 계산대예요. 손님이 많던 시절엔 어느 테이블이 커피인지 쌍화차인지 헷갈리니까 이렇게 붉은 조각은 커피, 녹색 조각은 쌍화차…, 식으로 표시해놓은 거지. 다 잘나가던 시절 얘기랍니다." 설명 끝에 주인 이씨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테이블 위엔 '비사표 덕용성냥'이란 상표의 곽성냥이 한 갑 놓여 있었다. 성냥을 만드는 곳은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주식회사'다. 회사 측은 "20년 전보다 곽성냥 수요가 무려 백 분의 일로 줄었다. 곤로(풍로의 일본말)에 불을 붙여 밥을 짓던 옛날 풍습이 사라진 것도 이유지만, 무엇보다 성냥을 납품할 업체가 줄어든 탓"이라고 말했다.

성냥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슈베르트 음악이 더는 흐르지 않는 가게. 이젠 먼지 앉은 스테레오 라디오에서 FM이 조그맣게 흐를 뿐이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60대 손님 한 명이 헛기침을 하며 신문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