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불리는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맞는 해다. 그런데 일본도쿄(東京) 시내에 거대한 '일한합방기념탑(日韓合邦紀念塔)'을 40년간 세워 놓고 있었다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탑은 젊은이들의 거리라는 하라주쿠(原宿) 근처인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앞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세워졌다. 메이지신궁은 현재 한국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다. 더 놀라운 것은 탑 모양이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똑같다는 것이다.

부지 76평에 세워진 탑의 높이는 32척(약 10m)이다. 실제 다보탑(높이 10.4m)과 거의 같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 탑을 세우고 '일한합방기념탑 사진첩'이란 자료를 출간한 단체는 극우단체 흑룡회(黑龍會)"라고 했다.

1934년‘일한합방기념탑’의 건립 당시 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흑룡회 간부들.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앞줄 오 른쪽에서 세 번째), 우치다 료헤이(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등 흑룡회의 중심 인물들이 앉아 있다.

흑룡회는 일본의 한국 병탄과 대륙 침략에서 선봉에 섰다. 이들이 탑을 세운 건 1934년 11월 29일이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다보탑 실측 도면을 근거로 다보탑과 같은 화강암을 이바라키현(茨城縣)에서 6000관(2만2500㎏)이나 캐 왔다.

콘크리트로 지반을 만든 뒤 철근으로 탑의 축을 잡아 놓고 옮겨온 돌을 붙여 작업을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겉모습만 흉내 낸 셈이었다. 탑 내부 석실 안에 넣어놓은 탑기(塔記)엔 이런 글을 새겼다.

"일한합방은 양국 지사(志士)에 의해 계획된 것이며 아시아연방을 조직해 동아(東亞)의 신문명을 건설하고 세계평화에 공헌하고자 하는 데 있다(…) 영구히 메이지 천황의 유업을 찬미하여 받들기 위한 것이다." 탑기와 함께 안치했던 동판에는 '합방의 공로자' 413명의 이름을 새겼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강제병합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등 일본인 60명과 이용구·송병준 등 한국인 353명이다. 이 명단은 1980년대에 서지학자 이종학씨에 의해 분석되기도 했다. 의아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이름이 명단에 없다는 것이다. '일한합방기념탑 사진첩'은 명단을 기록한 뒤 '부기(附記)'를 통해 그 이유를 적었다.

"병합조약에 서명한 현직 당국자들은 일진회에 권력을 빼앗길까 우려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겼으므로 동양 도덕의 근본인 신자(臣子)의 길이 아니다." 이들은 일본측에서도 용도 폐기됐던 셈이다. 기념탑 건설을 주도한 흑룡회의 대표적 인물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탑 건립 취지에서 "일한합방이 한국측의 제창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항적 사상이 여전한 것은 일한합방에 대해 기대했던 조선인의 희망을 우리 당국자들이 무시한 결과"라며 "합방은 대일본제국을 종주로 하는 아시아연방조직의 경륜을 실행하고자 계획된 것"이라고 강변했다.

결국 기념탑을 세운 목적은 '한일병합은 결코 일본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간절한 청원을 일왕이 받아들여 이뤄진 것'이라는 거짓 선전을 통해 강제병합을 정당화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르려는 데 있었다.

김원모 교수는 "탑을 다보탑 모양으로 만든 것은 그것을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한국인의 반발을 걱정해 탑 건립에 반대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흑룡회는 기념탑 건립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기념탑과 관련된 내용은 조선일보·동아일보는 물론 총독부 한국어 기관지 매일신보에도 실리지 않았다. 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만이 다뤘을 뿐이다.

경성일보는 제막식 이틀 전인 11월 27일자에 사진 없이 짤막한 기사를 실었다. 이 탑은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1945년 광복 뒤에도 30년 동안이나 버젓이 존속해 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인근 요요기(代代木) 공원 일대에서 열릴 때 이 탑은 한국인들의 눈에 띄게 됐다. 탑이 쓸데없는 화(禍)가 된다고 여긴 일본인들이 1975년쯤에 철거했다는 것이다.

재일교포가 발행하는 일본 잡지인 월간 '아리랑'의 인터넷판은 1999년 3월의 기사에서 "원주인이 토지소유권을 주장했다거나 도시개발 계획 때문에 헐리게 됐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해체된 탑 부재는 어떻게 됐을까? ▲'일한합방기념탑'이라고 쓴 탑신 일부와 돌사자, 동판은 오메(靑梅) 시에 있는 일본 우익단체의 신사인 다이도신사(大東神社)로 ▲탑 위쪽 부분은 이바라키현의 사노이에(滋野家) 석재사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월간 '아리랑'은 "(당시 일본측은) 골치 아프니 잠시 철거했다가 언젠가는 다시 세우겠다는 뜻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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