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在佛) 학자 박병선(81) 박사가 사료 수집차 한국을 찾았다가 암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각계에서 뜨거운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박씨가 한평생 문화재 연구에 전념하느라 재산이 없어 지인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는 사연이 보도된 뒤, 기업과 일반인 사이에서 "박씨의 치료비를 마련하고 연구를 지원하자"는 움직임이 속속 가시화되고 있다.

웅진코웨이(사장 홍준기)는 회사 차원에서 '박병선 기금'을 마련해 박씨의 치료비를 대고, 앞으로 박씨의 연구를 잇는 데 기여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웅진코웨이 관계자는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고 해석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박씨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박병선 학술상'(가칭)을 제정해 후학들에게 수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삼성화재, 신한은행, 한독약품 등은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문화재 지킴이'로 활동해온 8개 기업도 자체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씨의 투병과 연구를 돕기 위해서다. '문화재 지킴이'는 문화재청 주선으로 기업 특정 문화재를 정해 각종 보호사업을 후원하게 하는 제도다. 문화재청 직원들도 협약 기업들과 발맞춰 자체적으로 모금에 들어갔다.

9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지인 이 선물한 규장각 관련 도서를 읽고 있다. 박씨는 암 투병 중에도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청주시도 박씨를 돕기 위해 공식 모금 운동에 나섰다. 청주시는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된 흥덕사가 있는 곳으로, 2006년부터 매년 '청주직지축제'를 열고 있다. 청주시는 충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정계좌(농협 301-0034-9322-11)를 개설하고, 공무원과 민간인의 자발적인 성금을 받고 있다. 청주시는 지난 7월부터 위기 가정을 돕기 위해 매월 일정액을 적립해온 '천사(1004) 나눔운동' 기금에서도 치료비를 지원할 방침이다.

본지에도 학생, 가정주부, 회사원 등 일반인 50여명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성금을 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한 대기업 계열사 임원은 "지금까지 돈이나 명예에 급급해 살아왔는데, 옳다고 생각한 일에 한평생을 던진 박씨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박씨를 돕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다른 사람과 사회에 관심을 갖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박민재(6)군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가 빨리 나아서 역사책을 많이 많이 쓰길 기도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박씨가 입원 중인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는 지인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해외 유력 언론에서 활동하는 원로 언론인 피터 현(72)씨는 "프랑스 음식이 먹고 싶다"는 박씨를 위해 치즈와 바게뜨 등을 가져왔다. 2003~2007년 주불(駐佛) 한국대사를 지낸 외교관 주철기(63)씨도 부인과 함께 박씨의 병실을 찾았다. 주씨는 한평생 연구실도 없이 집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외롭게 외규장각 도서 해석 작업을 해온 박씨를 위해 한국대사관의 사무실 한 칸을 내줬던 사람이다. 재불 화가 이성자(1918~2009) 화백의 아들 신용극(64) 유로통상 회장, 유인촌(5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도 쾌유를 비는 꽃을 보냈다.

박씨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실 줄 몰랐다"며 "빨리 일어나서 병인양요 연구를 마무리하고, 독립운동사 연구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1967~1980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 종 이상의 장서를 뒤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문화재 반환 운동에 불씨를 댕겼다. 지난 9월 초 병인양요 관련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방한한 박씨는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직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