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모(여·25)씨는 초등학교 영어 학원의 강사로 취직했다. 첫 수업에 들어간 이씨는 20~30명의 아이들이 이미 유치원서부터 영어 이름 하나쯤은 다들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면서 영어에 일가견이 있는 이씨는 자신의 영어이름을 케일린(Kalyn)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아직 발음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이씨를 자꾸 ‘켈리’(Kelly)라고 부르는 등 국내에 다소 생소한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이씨는 “영어 이름에 대한 정보가 없어 혼자 짓기 어려웠다”고 했다.
이씨는 서울 종로구의 한 작명업체를 운영하는 최혁(44·작명가)씨에게 “아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운수에 맞게 ‘돈’도 잘 벌 수 있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최씨는 “영어 이름이 발음이 좋고 세련됐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운에 도움을 줘야 한다”며 이씨의 사주를 봤다. 최씨는 이씨에게 물(水)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에 배속되는 한글 ‘ㅂ’발음과 유사한 영어 이름의 첫 음절로 ‘V’를 하기로 결정했다.
최씨는 미국사회보장국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올해 유행한 이름’ 통계와 외국 옥스퍼드(Oxford) 인명사전 등을 참조해 얼마 전 수천 개의 영어 이름과 한글 이름을 대응시켜놓은 자기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최씨는 이를 보고 바네사(Vanessa)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발음하기도 쉬우면서 아이들도 친근함을 가질 만한 이름이라는 것. 또 바네사는 지난 2000년 초반부터 미국사회보장국에서 정하는 인기여름 60~70위를 오가는 이름이었다.
최씨는 3년 전부터 작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한글·한자 이름만 지었지만 올해부터 영어이름도 작명하고 있다. 최씨는 “올해 작명 사이트를 새로 개설했는데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매일 300명씩 ‘영어 이름’이라는 키워드를 치고는 방문한다”며 “한글이나 한자로 이름을 지으려는 사람들의 두 배 정도 수치”라고 말했다.
과거부터 영어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있어 왔지만, 최근 들어 그 양태가 가지각색이다. 지금까지는 주먹구구식으로 주위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짓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테면 흔히 알고 있는 마이클(Michael)이나 사라(Sarah)로 이름을 지어버리는 경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연구하는 작명가에 부탁하거나 순수한 한글이름을 본 따 영어 이름을 짓거나 인터넷 영어 작명사이트 등을 통해서도 이름을 짓고 있다. 깊은 의미가 담긴 한글 이름만큼이나 영어에도 의미를 부여하자는 이유에서다.
영어 이름을 짓는 사람들도 다양해졌다. ‘신생아’뿐만 해외에 이민가는 유학생, 출장하는 직장인, 국내에 거주하지만 ‘영어권 환경’에 익숙한 학생, 심지어 영어 학원 강사도 영어 이름을 돈 주고 짓는다.
때문에 인터넷 영어 작명업체들도 3~4년부터 4~5개씩 더 생겨났다. 주로 10만원~18만원 선에서 영어 이름 하나만을 짓거나 패키지로 한글과 한자까지 짓는 방식이다. 율도국 개인 브랜드 연구소의 김홍렬(44) 대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이름 짓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며 “지금은 한 달에 100명이 이름을 지으면 10명은 무조건 영어 이름을 짓겠다고 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과거 방송작가 등을 거친 현직 시인인 김 대표는 “순수 한글 이름과 비슷하게 영어 이름을 만들자”며 작명 일을 시작했다. 그는 “세계에 나갔을 때 한글 본명과 영어 이름이 비슷하면 한국의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좋지 않냐”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순수 한글로 ‘하늘’을 뜻하는 ‘마루’를 영어식으로 맥루한(Macluhan)으로 짓곤 한다.
2달 전, 김세빈(남·13)군이 “미국 유학을 가는데 영어 이름을 지어달라”며 김 대표를 찾았다. 김 대표는 각종 영어 사이트, 소설, 시를 참조해 이 아이의 이미지를 고려한 뒤 흑인·라틴 계열 사람들이 쓰는 이름을 배제했다. 3일에 거쳐 연구한 끝에 아이 이름의 첫 음절인 ‘세’(se)를 참조해 세바스찬(Sebastian)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 대표는 김 군의 부모에게 “영어 이름이 세바스찬인데, 아예 한글 이름도 ‘세찬’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김 군의 부모는 “정식으로 개명하는 것도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김 대표는 “자신만의 개인적인 느낌으로 물론 영어 이름을 지을 수 있지만 다양한 상황과 공간에서 쓰이는 이름의 역사를 공부한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