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나영이 사건'의 범인 조모(57)가 살던 경기도 안산의 오래된 저층 아파트 단지는 연휴 전의 나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극악무도한 성폭행범이 살던 곳이라 믿기엔 너무 평온했다. 단지 내의 유치원에서는 여자 어린이들이 까르르 웃고 장난치며 치맛자락을 나풀거렸다.
범인은 43㎡(13평)짜리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둘이 살았다. 그는 한때 공장에 다녔고 최근엔 일용직 막노동을 했다. 작년 12월 안산 단원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부인과 함께 있었다. 경찰은 '동사무소에서 왔다'고 속여 문을 열게 한 뒤 범인을 덮쳤다. 부인은 그때까지 남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범인의 집과 나영이 집은 1㎞ 거리였다. '악마'는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네티즌, 법원·검찰에 분노
이 사건의 참혹한 전모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면서 국민들은 범인뿐 아니라 대법원, 검찰에 분노를 폭발시켰다. 대법원은 "범인에게 '고작' 징역 12년을 선고했다"는 점에서, 검찰은 "1심 판결 이후 형량을 높이기 위해 항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분을 샀다.
이날 한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 창에 '조○○'이라는 글자를 써 넣자, '조○○ 사건' '조○○얼굴' 등의 관련 검색어가 주르륵 떴다.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범인의 판결문을 올리면서 범인의 실명과 잔혹한 범행수법이 세세히 알려졌다. 인터넷에 뜬 글의 골격은 판결문과 공소장에서 발췌한 내용이지만, 여러 사람이 가필해서 퍼나르는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내용도 뒤섞였다.
◆공분이냐, 마녀사냥이냐
이날 주요 포털 사이트와 블로그를 통해 범인의 얼굴이라는 중년남자의 사진이 확산됐다. 그러나 실제 사진 주인공은 이 사건과 무관한 김모(59·정당인)씨로 밝혀졌다. 인터넷에 나돈 것은 김씨가 2007년 인터넷 카페에 올린 증명사진이었다. 불특정 다수 네티즌들의 '마녀사냥'으로 멀쩡한 사람이 '인격 살인'에 가까운 모욕을 당한 것이다.
김씨는 "오늘 오후 벌초를 갔다가 지인으로부터 내가 성폭행범으로 지목돼 사진이 떠돈다는 전화를 받고 처음엔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며 "근거도 없이 사진을 올리고 유포한 사람들에 대해 끝까지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네티즌들이 판결문과 판사들 실명을 퍼뜨리는 과정에서 절대로 공개돼서는 안될 나영이의 신원도 한동안 인터넷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뒤늦게 해당 사이트가 관련 글을 삭제했지만, 나영이와 나영이 가족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현행법에 따르면 피해자의 실명을 공개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 벌금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안산시에도 분노 집중
안산시의 몰인정한 행정도 분노를 더했다. 나영이 엄마는 사건 전까지 나영이와 둘이 살다가 사건 후 나영이 아빠와 연락했다.
나영이 엄마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매달 시에서 기초생계급여 48만여원을 받아 생계를 꾸렸다. 사건 후 안산시는 의료비 359만9000원을 지원했지만, 나영이 부모가 개인적으로 가입해뒀던 보험에서 4000만원을 받아 나영이 치료비 등으로 썼다는 사실을 알고, 생계급여 지급을 중단하고 의료비 일부도 환수하려 했다. 민간 보험금을 탔으니까 이중 지원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비판이 쏟아지자 이날 안산시는 "재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 5~7월 3개월 동안 기초생계급여 지급을 중단했다가 8월부터 재개했고 의료지원금도 환수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안산시는 이날 "경기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협력해 나영이를 돕는 지정기탁금을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명무실한 신원공개제도에 분통
신원공개제도에 대한 불만도 쏟아져나왔다. 현행법은 주민들이 관할 경찰서에 가서 자기 동네에 어린이 성폭행범이 사는지 열람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열람 방법이 '주민이 관할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미성년 자녀를 뒀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식으로 까다로울 뿐 아니라, 열람 대상도 해당 구(區)에 주소지를 둔 범죄자들로 한정돼 있다.
이번 사건 범인은 전과 17범이었다. 그중 5건이 강간치상 등 성범죄였지만 이번 사건 전까지 신원공개 대상이 아니었다. 과거의 피해자들이 어린이가 아니었다는 이유였다. 나영이네 동네사람들은 이웃에 '악마'가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