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일반 대졸 사원보다도 못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매일경제가 1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지난 8일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의 종합우승 소식이 전해진 직후 역대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 100명에게 기능인들이 처한 현실과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을 물었다. 설문 결과 그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사회가 우리를 단 한 번도 우대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박모(29·가명)씨는 199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35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그래픽디자인 부문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금메달 덕에 박씨는 곧바로 국내 굴지 대기업 광고사에 입사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하지만 `기능올림픽 금메달` 효과는 딱 거기까지였다. `금메달`보다는 `실업계고 출신`이라는 딱지가 현실에서는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같은 해에 입사한 `대졸` 동기들과 하는 일에서 차이가 났다. 대졸 입사동기들은 프로모션 기획안도 제출하고 기획회의에도 참여하며 능동적인 업무를 해나갔지만 박씨는 회의에서 결정된 안들을 예쁘고 보기 좋게 디자인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2003년 기능올림픽 대회에서 메달을 딴 김영환 씨(가명)는 `기회비용`을 이야기했다. 김씨는 지방 공업고등학교에서 늘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학과 성적과 실습 성적은 최고였다.
김씨는 선생님 권유로 기능올림픽 출전을 준비했고 3년간 준비한 끝에 메달을 땄다. 지금은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학교에서 10등 안에 들면 인근 공단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특채될 수 있었다. 그 길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들어간 친구와 내 연봉 차이가 4000만원 정도 나는 것 같다”며 “기회비용치고는 너무 크다”고 씁쓸해 했다.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기능인에 대한 대우가 낮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홍근삼 씨(69·사진)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배운 기술이 저를 평생 지탱해 준 힘이 됐고 나라가 보상도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홍씨는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 양복부문에서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기능인이다.
그가 전하는 당시의 분위기와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다. 금메달을 따고 돌아오는 귀국길은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공항까지 마중나온 사람들이 `홍근삼 만세`를 외쳤고 김포공항에서 태평로까지 카퍼레이드도 했다. 당시 돈으로 100만원이라는 포상금을 받아 붉은 벽돌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홍씨는 “단순히 이런 환호나 포상금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술인` `기능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큰 차이가 난다”며 “예전에는 기능인을 기능 자체로 평가했지만 요즘에는 `얼마나 공부를 못했기에 기능을 익혔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메달을 딴 후 40여 년이 흘렀지만 홍씨는 여전히 손수 치수를 재고 바느질을 한다. 손끝의 감을 잊는 순간 끝이란 신념 때문이다. 그의 옷만 찾는 단골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홍씨는 “IMF 외환위기 명퇴 바람에도 기능인들은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며 “후배들도 어렵더라도 자기 기능을 믿고 그 기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매일경제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