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는 당초 20부작으로 기획된 사극 '탐나는도다'를 최근 16부 만에 조기 종영시키기로 결정했다. 5% 안팎인 낮은 시청률 때문이다. 그러자 이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조기 종영 결사 반대' 서명 운동은 물론, 신문 광고를 내고 여의도·광화문 등지에서 항의 집회를 벌이며 저항했다. 그들은 사극 주인공인 프랑스인 피에르 데포르트(한국명 황찬빈)에게 열광했다. 방송사 인터넷 게시판에는 "진짜 보석 같은 배우", "동화 속 왕자님 같다" 같은 찬사가 즐비하다. 가장 한국적인 장르인 사극에 외국인이 주인공을 맡은 것도, 그 주인공 때문에 시청자들이 투사가 되는 것도 3~4년 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요즘은 대중이 외국인까지 식구로 감싸는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 순혈주의에 대한 오랜 집착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하지만 지난 며칠 사이 벌어진 인터넷 재판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교포 3세 가수를 매섭게 꾸짖는 대중 독설에는 얼핏 순혈주의나 국가주의의 그늘마저 비쳤다. 2PM 리더 재범(본명 박재범)은 미국판 싸이월드인 '마이 스페이스'에 연습생 시절 올린 "한국인이 싫다", "돌아가고 싶다" 같은 글 내용이 문제가 되어 십자포화를 맞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수만개 댓글은 대강 이랬다. "재범은 한국에 돈 벌러 온 미국인일 뿐이다", "군대도 안 가는 미국 시민권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재범은 제2의 유승준이다"….

인터넷에 비속어 가득한 글을 수시로 올려놓았다는 것은 분명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한 청년의 약점을 드러낸다. 거리에서 춤추던 그였다. 그가 영어로 쓴 문장을 보면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 한국에서 대중 스타를 꿈꾸었다면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더 조신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원칙 없이 변덕만 심한 우리의 인터넷 문화다. 자극적으로 발췌 인용된 말 하나 때문에 거의 사형 선고에 가까운 재판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논란이 불거진 지 나흘 만에 당사자가 소속 그룹을 탈퇴하자, 이번에는 역시 4년 전에 쓴 다른 글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 방금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어. 나 한국에서 일 년쯤 살아보고 싶어. JYP 연습생 말고 그냥 평범한 한국 사람으로. (이곳이) 어떤가 보고 싶고."(www.xanga.com)….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그에 대한 동정론 쪽으로 여론이 흘러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 말이 서툴렀던 10대 가수지망생 시절 박재범군은 자신이 별 뜻 없이 내뱉었던 넋두리 때문에 4년 만에 눈물을 머금고 한국을 떠나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고, 지금 다시 동정론이 퍼지고 있다는 점에 더 난감해할 것 같다.

우리 대중음악계에는 유난히 표절시비가 많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은퇴한 가수는 없다. 마약, 도박,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사고를 내도 다시 살아나는 대중스타도 많다. 하지만 유승준이나 재범처럼 국가, 민족 혹은 군대 문제에 걸렸다가는 연예인 경력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재범은 분명 잘못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던 연습생 시절의 몇 마디에 분노해 결국 그를 매장시키는 대중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외국인 사극 주인공에 열광할 정도로 우리 문화에 자신감을 가진 한국인의 마음 밑바닥에는 아직도 '미국 시민권자'에 대한 몽니 같은 것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혹시 민족주의를 곧 '타자 배척'으로 인식하는 몇몇 인터넷 워리어들이 우리 대중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젊은 가수의 퇴출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