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3명의 무관 중 한 명이었던 홍사익.

구한말 3명의 무관이 있었다. 한명은 홍사익. 일본에 철저히 협력한 그는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일본군 장군(중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제14방면(필리핀)군 병참총감 겸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종전 후 A급 전범이 되어 1946년 9월 26일 마닐라 전범수용소에서 처형됐다.

다른 한명은 지대형. 일본군 중위로 근무하던 그는 3·1운동 직후 탈영해 만주로 망명했다. 그 후 이청천이란 가명으로 신흥무관학교 교관, 대한독립군단 여단장,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등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무임소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마지막 한명은 이응준. 그 역시 홍사익처럼 일본군 육군 대좌(대령)를 지냈으나, 미 군정 군사고문으로 한국군 창설의 산파역을 맡은 뒤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이들 3명이 100년 전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로서 일본 유학을 떠난 동창생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9월 4일 다음과 같은 소식을 실었다.

지대형

"무관학도 44명은 예정대로 작일(어제) 오전 9시 남대문정거장에서 차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더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것은 고종의 양위 직후인 1907년 8월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야밤에 반포된 순종의 칙령에 따라 전투부대는 해산되었고, 군부(軍部)·육군법원·육군무관학교 등 비전투부대만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이들 부대마저 해산된 것이 1909년 7월. 통감부는 무관학교를 폐교하는 대신 생도 일부를 선발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보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을 응원하는 시평을 실었다.

"우리 무관 학도들아 학교 비록 폐지되어 학업 중지되었으나 자긍심을 잃지 마세. 잠시 운수 불행하나 좋은 기회 또 있으니 우리 대한(大韓) 인종으로 일당천백 못할손가. 어화 우리 학도들아 저 동해를 건너가서 풍한서습(風寒暑濕) 쉴 때 없이 칼을 손에 놓지 말고 그 학업을 성취 후에 우리 국권 회복하여 유방백세 하여보세."(8월 12일자)

동경에 도착한 무관생도들은 육군중앙유년학교 한국학생반에 편입되었다. 일본 생도들과 똑같은 제복에 똑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견장만은 붉은색 대신 분홍색으로 구분되었다. 유학을 떠난 지 1년 만에 대한제국이 패망하자 한국학생반은 해체되었다. 44명은 숙의 끝에 졸업하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일본 육사 26기 졸업생인 이들은 그 후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인 가운데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홍사익과 이응준은 '일본 군인의 길'을 택했으나, 그 결말은 달라졌다. 반면 지대형(이청천)은 '국권 회복의 길'에 몸을 던졌다. 대한제국이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조국의 군인이 되었을 무관생도들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난 9월 1일자 A33면 '제국의 황혼'② 기사에서 홍사익은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일본군 장군이 된 인물이 아니라, 이희두·조성근·어담·왕유식·김응선·영친왕에 이어 일곱 번째로 장군이 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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