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진접으로? 나는 마석 쪽 알아보고 있어." "30년 지기(知己)들도 뿔뿔이 흩어지는구먼. 길 하나 두고 마주보며 가족처럼 지냈는데…."

25일 오후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역 1번 출구 골목길에 영세 공장 주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화제는 '누가 어디로 이사 가는지'였다. 거리에 늘어선 공장은 예닐곱 곳만 빼놓고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을씨년스런 풍경이 '왕십리 마치코바'의 현주소다. 마치코바(町工場)는 일본어로 동네 소규모 공장을 뜻한다. 왕십리도 1960년대부터 마치코바로 불렸다.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제조업의 세포 격이다.

금형공장, 철 절단 공장, 공작기계 공장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장이 길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왕십리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공간은 서너평, 대개 '사장' 혼자이고 직원이래 야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김학설(63)씨는 1969년 이곳에 왔다. 당시 23세였다. 을지로 금형공장 기능공이었던 그가 가게를 열 때 주변 공장은 네댓곳에 불과했다. "월세가 싸 기술자들이 몰렸지. 1970년대가 전성기였어. 이런 공장들 천지였으니."

요란하게 기계 돌리던 소리 대신 떠나는 이들의 한숨만 남았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흔적이 남은 왕십리 골목은 쓸쓸한 퇴장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서 청춘을 바친 이들이 오늘도 어렵사리 하루를 이어간다. ☞동영상 chosun.com

2·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1970년대 중반 왕십리 공장 거리 경기가 달아올랐다. 수출이 급증하면서 부품 하도급을 맡은 업체들은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화물트럭 사이드미러를 찍어내는 금형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했다는 김씨는 "일감이 한 달 이상 밀려 있을 정도로 주문이 많았고 밤새 일해도 끝이 없었다"고 했다. '왕십리 마치코바'의 특수(特需)는 올림픽 때까지 계속 됐다.

김씨는 "셋방살이 접고 내 공장을 갖게 됐고 한때 직원을 11명까지도 둘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고 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왕십리 거리에는 올림픽이 끝나면서 찬바람이 돌기 시작했다.

정부 지원에 힘입어 창업이 급증한데다 금형 기술자가 넘쳐 경쟁이 치열해졌다. 땅값, 월세, 재료값, 인건비는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80평 공간을 소유한 김씨도 요즘엔 공장에 직원 둘만 두고 있다.

왕십리에서 30년째 금형공장을 하는 이상봉(55)씨는 "2000년 이후에도 중국과 동남아의 저가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도 큰 물량은 중국에 맡기고 몇백개 이하의 소량 부품만 이곳으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외국에 맡기면 물류비가 더 드는 소량 주문만 왕십리의 차지가 되면서 영세업자들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20~30년 전 왕십리는 '재료만 갖다주면 탱크도 뚝딱 만들어내는 곳'으로 불렸다"고 했다.

그랬던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주춧돌이 이제는 완전히 찬밥 신세다. 1979년 금형공장을 연 그는 1990년대 초반 공장 문을 닫을 뻔했다. 올림픽 후 기업들이 플라스틱 대야나 쓰레기통을 사은품으로 뿌리면서 반짝 호황이 찾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노태우 정부가 "사은품이 넘쳐나 쓰레기만 늘고 있다"고 하자 하루아침에 주문이 끊겼다. 대량 생산을 위해 추가 고용한 기술자와 기계가 하루아침에 빚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씨는 "직원들 내보내고 가게 규모도 줄여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잘 된다고 공장을 함부로 키웠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왕십리 일대의 소형 공장들이 규모를 키우는 데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또 있다. 대기업 하도급을 맡은 중소기업이 이들에게 다시 하도급을 맡기면서 제때에 값을 치르지 않거나 심지어 떼먹은 것이다.

중소기업과 거리의 공장들 간의 신뢰 결여는 국내 소형 공장들이 일본과 대만처럼 중소기업으로 크는 것을 막아버렸다. 부도를 가까스로 피한 이씨는 IMF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공장 월세만 간신히 댈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다.

그는 "땅 사놓은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우리는 공장에 투자했다가 빚만 잔뜩 지게 됐다"며 "동료 중에서 공장이 망해 목숨을 끊은 이가 4명이나 된다"고 했다.

20평 남짓한 공장을 얻어 알루미늄이나 구리 등을 녹여 철제 거푸집에 눌러 넣어 제품을 만드는 '다이 캐스팅'을 해온 그는 왕십리를 떠난다. 왕십리 뉴타운 3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이 재개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600개가 넘던 공장 가운데 80% 이상이 이곳을 떠났다. 이미 헐린 공장도 있다. 남은 공장 가운데 상당수도 옮길 지역을 물색하느라 분주하다. 이씨는 '울며 겨자먹기' 심정으로 경기도 마석행(行)을 결정했다고 한다.

인근 성수동으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공장 월세가 왕십리의 2배여서 뜻을 접었다. 그는 "경기도로 공장을 옮기면 수십년 동안 맺어온 거래처들이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갈까 두렵다"고 했다.

경기도 마석, 진접, 서울 성수동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왕십리 마치코바'들은 협업(協業) 체계의 붕괴를 가장 걱정하고 있다. 철을 사와 매끄럽게 다듬고 줄로 정밀하게 자른 뒤 컴퓨터로 가공하는 작업들은 분업에 가깝다.

왕십리에는 이런 가게들이 붙어 있지만 흩어지면 제품 만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운반비도 크게 늘어난다. 공장 주인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옮겨 가면 비싼 월세 때문에 모두들 석 달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와이어 커팅공장을 하는 백성현(49)씨는 이사 계획을 접기로 했다. 백씨는 "조합에서 300만원 더 줄 테니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지만, 그것으로는 성수동 월세를 댈 수가 없다"며 "버티는 데까지 버티겠다"고 했다.

1977년 왕십리에 첫발을 디딘 그는 금형 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다 2001년 와이어 커팅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컴퓨터 조작 능력이 접목된 와이어 커팅 기술이 단순 금형보다 수요가 더 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백씨는 "조그만 공장이라고 얕보는 사람도 있지만 왕십리의 공장들은 변화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며 "이제는 젊은이들 중에 기술을 배우겠다는 이들이 없어 소형 공장들은 말라죽을 판"이라고 했다.

왕십리 공장 거리의 주력은 50대 이상이다. 40대면 젊은 축에 속하고 30대는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동남아나 중국 출신 근로자들이 있지만 이들은 기술을 익힌 후 다른 공장으로 가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왕십리 거리의 공장들은 뉴타운 개발 계획 수립 초기에 이곳에 아파트형 공장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경기도 부천처럼 아파트 형태의 건물에 금형 등 제조업 관련 공장을 모아 단지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그러나 "금형공장은 도심 부적격 업종이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왕십리 소형 공장 거리를 발전적으로 살려가자는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개발 논리에 묻혔다.

1977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여기서 비철금속 부품가공을 해온 이재운(55)씨는 "공단 덕에 성장한 문래동이나 성수동과 달리 왕십리는 순수하게 자생적으로 커 온 곳이라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는 "주식회사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소규모 공장으로만 구성된 이곳은 서로 벤치마킹하며 기술력을 키워왔다"며 "50년 가까이 이어온 왕십리 마치코바를 하루아침에 없애지 말아달라는 호소도 외면당했다"고 말했다.

왕십리 공장 거리는 이제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한다. 철거를 앞둔 이곳은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이들의 한숨으로 가득 찼다. 수십년간 계속됐던 요란한 기계 소리도, 쇳가루 냄새도 이젠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조연이었던 이들이 청춘을 바친 '왕십리 마치코바' 거리에는 고층 아파트 20여채가 들어설 계획이다. 2000여 가구가 살게 될 이곳 뉴타운은 예전의 왕십리를 기억해 줄까.

왕십리 속칭 마치코방 골목의 아직 남아있는 공장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