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런 첫 대결
82~83시즌 네덜란드 리그는 '왕의 귀환'으로 술렁거렸다. 크루이프가 아약스에 복귀한 것이다. 30대 중반의 노장이었지만 여전히 그를 잡을 저격수는 없었다.
그의 등장은 PSV 에인트호벤 진출 이후 세 시즌째를 맞은 허정무에게도 변화를 불러왔다.
두 팀은 늘 우승을 다투던 리그 양대산맥. 붙었다 하면 전쟁이었다. 1982년 늦가을, 암스테르담 원정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던 리브렉스 감독이 허정무를 불렀다.
"크루이프 어떻게 생각해?" "훌륭한 선수죠."
"해볼래?" "좋습니다."
"자신 있어?" "자신 있습니다."
네덜란드 축구 영웅이 진돗개한테 걸려든 것이다. 영웅과의 영광스런 한판을 꿈꿔 온 허정무는 쾌재를 부르며 어금니를 물었다.
천하의 크루이프가 듣도 보도 못한 후(Huh) 따위를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휘슬이 울리고 나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빈틈없는 그림자 마크, 집요한 몸싸움, 과감한 태클.... 크루이프는 아무것도 보여주지를 못했다. 전반을 마친 크루이프는 "무릎 아프다"며 경기를 포기했다. 정말 아팠는지, 더 이상의 망신이 두려웠는지는 몰라도.
원정에서 비겼으니 PSV로서는 큰 수확이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크루이프와 허정무가 충돌하는 사진을 싣고는 비슷한 내용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45분 이후 크루이프를 볼 수 없었다'.
이날 허정무의 활약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네덜란드 간판스타 루드 반 니스텔루이(33)가 한 인터뷰에서 "후는 나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다"고 고백한 데서도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고를 부른 두 번째 대결
크루이프를 잠재운 후는 일약 스타가 됐다. 신문마다 그의 활약을 대서특필했고, 축구 관련 기사마다 후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크루이프가 인터뷰에서 "후는 좋은 선수"라고 칭찬하는 바람에 인기는 더욱 올라갔다.
83년 봄, PSV와 아약스는 컵대회 준결승에서 다시 붙었다. 1차전 장소는 아약스의 앞마당 암스테르담. 크루이프와 허정무의 두 번째 대결에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휘슬이 울렸고, 분위기는 또 허정무 쪽으로 흘렀다. 짜증을 부리던 크루이프는 전반 중반쯤 마침내 허정무를 제압했다. 놀랍게도 발이 아닌 팔꿈치로. 볼을 받으려고 달려가는 크루이프의 오른쪽을 허정무가 압박하자 팔꿈치를 날린 것이다.
허정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경기장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왼쪽 눈을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어요. 뛰고는 싶은데 일어설 수가 없더라고요. 그걸로 끝이었죠."
볼도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폭력인데도 심판들은 "못 봤다"며 비열한 국민 영웅을 감싸기에 바빴다. 그렇다고 홈팬들이 문제를 제기할 리도 만무했다.
진드기를 털어낸 크루이프는 펄펄 날며 아약스의 2대0 완승을 이끌었다.
에인트호벤으로 돌아온 허정무는 기가 막혔다. 얻어맞고, 패한 것만도 분해 죽겠는데 얼굴이 퉁퉁 붓고, 피멍까지 들어 한 경기를 쉬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식으로 달걀 마사지도 하고, 쇠고기를 사다 붙이기도 했죠. 병원 치료만으로는 성에 안 차서요. 빨리 나아 크루이프를 해치워야 했으니까요."
▶허탈한 마지막 대결
2주 후 2차전 홈 경기가 벌어졌다. 경기장은 만석이었다. 부득부득 이를 갈아 온 홈팬들은 관중석에 이스라엘 국기와 함께 '크루이프, 죽여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네덜란드 국민 영웅 크루이프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사고가 나도 크게 날 판이었다. 허정무도 거의 회복해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한데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크루이프만 잡으면 반은 성공이라는 건 코흘리개들도 아는 이치건만 감독은 허정무를 왼쪽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그라운드에 나가자 더욱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중원의 사령관 크루이프 또한 자기네 감독으로부터 왼쪽 미드필더로 뛰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둘이 정 반대편에서 뛰게 된 것이다.
"두 감독이 사고를 막기 위해 일부러 떼어놓은 것 같아요. 안 그랬다면 그런 포진은 나올 수가 없거든요. 저도 벼르고 있었죠, 신사로 소문난 우리 팬들도 이미 광팬으로 변해 있었죠, 둘이 붙었다 하면 사고는 100%였으니까요."
감독들의 합의는 의외로 쉬웠을 것이다. 아약스 감독은 크루이프를 자유롭게 뛰게 할 수 있어서 좋았을 테고, PSV 감독은 크루이프의 활동 영역을 한쪽으로 제한할 수 있어서 좋았을 게다.
그렇다고 마음 접을 진돗개던가. "반대편에 있다고 부딪칠 기회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요." 기회를 노리던 허정무가 크루이프를 향해 몸을 날린 건 전반 20분. 크루이프가 볼을 받으려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볼을 뺏는 척하며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죠." 네덜란드 진출 3시즌 만에 처음으로 옐로카드를 받긴 했지만, 이후 크루이프의 플레이는 크게 위축됐다.
승부는 2대0 PSV의 승리. 1차전 0대2 패배를 고스란히 돌려줬다. 곧바로 연장전이 시작됐고, 1골을 더 넣은 PSV의 승리가 굳어지는 듯했으나, 종료 직전 자책골로 종합스코어는 3대3. 승부차기에 들어갔으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두 골을 넣은 토레슨(노르웨이)과 허정무의 실축이 이어졌고, 결국 아약스의 3-2 승리로 막을 내렸다.
허정무는 그해 여름 네덜란드를 떠났고, 둘은 26년이 흐른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베켄바워하고도 붙어 봤고, 마라도나하고도 붙어 봤지만, 크루이프가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빠르고, 시야 넓고, 특히 순간적인 방향전환은 환상이었죠. 아마 크루이프도 후는 기억할 겁니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