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경제부 차장대우

지금 미·중 전략대화가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법과 쌍용차, 북한핵 국제협상 문제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던 지난 22일,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발언에 겁이 덜컥 났다. 한국의 9배인 2조1316억달러(6월말 현재)의 외환보유액을 중국기업들의 해외기업 M&A(인수·합병) 지원에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필자에게는 마치 한국에 대한 '경고음'처럼 들렸다.

중국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원 총리는 지난 17~20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11차 해외주재 외교관 회의'에서 이 발언을 했다. 중국경제의 총사령탑인 원 총리가 중국 외교관들과 국영기업들에게 해외기업 사냥의 '진격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린 것이다.

물론 중국의 '쩌우추취(走出去·해외투자) 전략'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손실을 많이 봤는데도 오히려 가속도를 내는 점은 다른 나라와 확연히 다르다. 안 그래도 식욕이 왕성한 페트로차이나(석유), 차이날코(알루미늄), 차이나텔레콤(이동통신), 중국은행(금융) 같은 국영기업들은 이제 정부의 명령까지 받았으니 미국·일본·영국·독일·호주·한국 진출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것이다.

중국이 해외기업을 인수해 경영에 성공하면 자국 인력을 수출하거나 교포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화교인맥이 점점 커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기업, 중국인과 몸으로 경쟁해야 하는 한국기업, 한국인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다. 뉴욕 월스트리트에서는 이 그림자가 그대로 드러난다.

8년간 미국의 명문 고교와 대학, 대학원을 나와 뉴욕의 투자은행에서 1년간 일하던 김모씨는 작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제가 나빠지자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이 '힘없는' 한국계 직원들을 1차 해고 대상 리스트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내 중국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인 친구들은 자리를 유지했다"고 했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직원 전모씨도 "미국 회사 내에 아시아인 몫은 정해져 있는데, 중국 파트너들의 영향은 커지는 반면 한국 파트너들은 외부 도움이 거의 없어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대기업의 미국 진출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소기업·자영업까지 고려하면 미국 내 중국 기업의 영향력은 작지 않다. 필자는 지난 2007년 12월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레스터 서로(Thurow) MIT 교수와 중국 인력의 미국 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푸른 스웨터에 재킷을 걸친 그는 맨해튼 호텔에서 만나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어날 겁니다. MIT와 하버드대의 뛰어난 자연과학도와 공학도 가운데 중국학생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보세요." 그는 "시간이 지나면 미국서 교육을 받은 중국계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미국대학 내 한국인 유학생은 12만7100명으로 중국인(9만210명)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한국 유학생들의 미국 내 취업 입지는 중국 학생들보다 점점 좁아지고 있다. 중국은 자국 기업과 화교네트워크가 유학생들을 '포용'하는 반면, 한국의 유학생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주 워싱턴에서 진행된 G2(미·중) 전략경제대화에 전 세계가 야단을 떨고, 드디어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됐다는데, 이 소식에 혹시라도 한국 유학생들의 어깨만 더 처졌을까 걱정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접어둔 채 국내로 밀려들어와 '국내파'들과 일자리 다툼을 할 그들에게 우리 정부는 어떤 대책을 갖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