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 몰려가 노인에게 욕설·삿대질… 인민재판 열린 서울광장'이라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됐다. 동영상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과 노란색 모자를 쓴 일부 시민들은 60~70대로 추정되는 노인 1명을 둘러싸고서 "이 양반아, 나이 먹었으면 나이 값을 좀 하라고", "당신은 선거하지마! 박정희? 그 ××새끼가 존중할 놈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조선닷컴 5월 29일 보도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 영결식날 '노인 인민재판' '서울광장 노인 학대'라는 이름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졌다. 이 동영상을 본 네티즌들 사이에 '조작설'이 제기됐다. ▲노인이 먼저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없는 편집 ▲만담하듯 노인과 청년이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 받는 점 ▲카메라의 위치가 자연스럽고 군중 속에서 한 인터넷 매체만 그 장면을 찍었다는 이유였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 짜고 연출했다는 말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 추모자들을 '싸가지' 없고 버르장 머리 없는 집단으로 매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관심은 "'노랑머리 청년'의 정체는 누구냐"에 쏠렸다. 당시 현장에 있던 몇몇 사람들 입에서 "남팔도 아니냐"는 말이 흘러 나왔다.

남팔도씨(사진 오른쪽)와 60~70대로 추정되는 노인이 서울광장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다. 남씨는“추모하러 온 사람들 모두가 '빨갱이'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억울함을 호소 하기도 했다.

'노랑머리 청년' 알고 보니 51세 중년

취재결과 그는 지역사회에서 '각설이타령 1인자'로 불리는 '품바왕' 남팔도(예명)씨였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동영상 속 사내는 '젊은이'는 아니었다. 그는 51세 중년이었다.

"아직도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 이 나라를 망가뜨린 게 바로 당신네들이야! 우리 젊은이들은 당신네들한테 지지 않아, 두고 봐!"

노인을 꾸짖었던 남씨는 '각설이계(界)'의 유명 인물이다. 1990년부터 '품바타령'을 한 경력 20년의 베테랑이다. 1992년에 '팔도예술단'을 창단해 출장밴드로 활약했다. 그의 동생과 아내 모두 각설이타령을 한다. 18년 연하의 아내와 전국을 떠돌며 품바 공연을 하는 사연은 2003년 MBC 방송국의 휴먼 다큐멘터리로도 방송됐다.

30만~50만원의 출장 행사비용을 받고 어른들의 회갑, 칠순 잔치나 체육대회에서 흥을 돋웠다. 코미디언 배삼룡씨나 영화배우 트위스트 김씨와 공연을 했고 2000년부터 5년 동안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품바극으로 전국 순회 공연을 했다. 노인들에게 무료 공연도 자주 해줘 "경로잔치에 남씨를 보내달라"는 문의도 많았다고 한다.

전국을 돌며‘품바 공연’을 하는 남씨의 사연은 언론에 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품바 중의 품바를 뽑는 충북 음성 품바축제에서 2006년 품바왕으로 뽑힌 그는 해외 공연을 다닐 정도였다. 2003년까지 두 장의 앨범을 냈고 사단법인 한국연예예술인협회 충북지회의 연기위원장을 맡고 있다. 남씨 홈페이지에 있는 '경찰일보 청주시 본부장'이라는 직함은 취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남씨는 지난해 3월부터 청주방송(CJB)의 한 프로그램에서 전속 리포터로 활동해 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박준규 PD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세트를 설치하는 등 스태프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고 말했다. 올해 1월 제작비 삭감으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남씨는 무보수로 방송을 했다.

방송국 리포터도 하차

지역사회에서의 인기가 오히려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인터넷에 동영상이 퍼지자 "남팔도씨가 아니냐"는 제보가 방송국으로 빗발쳤던 것이다. 동영상의 파장은 컸고 '노사모' 사이트에서조차 "이유를 막론하고 노인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1일 동영상을 올렸던 인터넷 매체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조작설'을 일축하기 위해 3분49초 분량의 영상 전체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돌발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처음 노인의 발언은 촬영하지 못했다"는 제작진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박 PD는 "남씨를 불러 진위 여부를 파악한 뒤 지난 1일 상부에 보고했다"며 "현재 남씨는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상태"라고 했다. 그는 "남씨는 평소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사모'도 아닌 것으로 안다"며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노인을 그렇게 대한 것은 그간 쌓은 공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일"이라고 했다.

동영상 속 노인이 "나는 (현 정권이) 잘한다고 봐요"라고 말하자 "도대체 이 머리에 뭐가 들었냐"며 노인의 머리를 치며 윽박질렀던 남씨는 평소 FTA광우병사태, 용산 참사와 관련해 비판적인 글들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다.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당신의 서거에 애도를 표한다"며 "내가 서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뒤돌아 본다"고 썼다. 그는 5월 29일 영결식에 맞춰 청주에서 홀로 서울 시청 앞으로 올라갔다. 그날 예정돼 있었던 청주방송의 녹화 일정도 영결식 때문에 연기 된 후였다.

노인이 먼저 부적절한 발언 했다?

남씨는 박 PD와의 면담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을 인정하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내가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너무 흥분을 해서 주위 분위기에 쏠린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억울함도 호소했다. 동영상 속 노인이 전단지를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를 향해 '빨갱이'라고 칭하며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폄하했다는 것이다. 남씨는 "나도 처음부터 노인의 상황을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가보니 노인 한 명이 '친북 대통령이 죽었는데 뭘 그렇게 애도를 하느냐'는 식으로 말을 해 서로 옥신각신하게 된 것"이라고 주위에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씨는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목소리가 큰 내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나온 것은 억울하다"며 "노인이 서울광장에 모인 추도객 모두를 '빨갱이'인 것처럼 묘사했고, 당시 주위 사람들이 먼저 노인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나이가 쉰 하나인데 마치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노인한테 막말을 한 것처럼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을 붙여 동영상을 올린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동영상을 올린 것이라는 것이다.

'동영상 조작설'에 대해서는 "노인과 인터넷 매체가 짜고 일부러 그런 반응을 유도했다면 몰라도 내가 섭외됐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다. 남씨는 현재 방송 프로그램을 하차한 것은 물론 생업으로 삼고 있던 공연 섭외도 끊긴 상태다. 당분간 조용히 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동영상을 올린 인터넷 매체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신청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