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라면 가끔은 하루쯤 꿈에서 깨어나기 싫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현실로부터의 탈피를 대표하는 행사가 있다. 서울과 부산에서 열리는 ‘코믹 월드’다. 서울 코믹은 한달에 한번, 부산 코믹은 두달에 한번 열린다. 애니 혹은 만화책의 팬들의 축제다.
5월 3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부산 코믹월드 현장을 찾았다. 기자도 말로만 들었지 처음 찾은 코믹월드 현장이었다. 코믹 월드 행사장은 크게 코스프레, 코믹 마켓, 애니메이션(Animation, 動畫, 이하 애니) 주제가 부문으로 나뉘어있었다.
코스프레란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일본식 조어(造語)로, 자신이 좋아하는 의상을 입는 취미생활을 말한다. 주로 행사장 밖의 야외에서 펼쳐졌다. 코믹 마켓은 동인(同人,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들이 모여 만드는 잡지나 캐릭터 상품을 사고 파는 곳이다. 애니 주제가 부문은 행사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무대에서 애니 주제가 노래자랑을 하거나 오프닝-엔딩 영상을 감상하는 행사다.
먼저 행사장 외부의 코스프레 행사장을 찾았다. 코스프레는 코믹월드의 행사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편이다. 소위 말하는 오타쿠(특정 소재 집중형 매니아)를 대표하는 요소로 꼽히기도 한다.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을 ‘코스어’라고 부른다.
코스어들은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의상을 입었다. 사진 촬영을 요청하면 해당 캐릭터에 어울리는 포즈도 취해준다. 장시간 서 있어야 하고, 주변의 시선을 받기 때문에 후유증이 며칠 간다고 한다. 코스어들은 자신의 코스프레에 몰리는 사진사의 수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코스어들과 친분이 깊은 사진사들도 있었다. 코스프레 참가자들은 코믹월드 현장에서 친해지거나, 애니 관련 까페에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코스프레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겁니다. 어른들에게 골프가 있듯이, 우리 취미는 코스프레인 거죠. 의상은 원래 직접 만들어야하는데, 요즘은 전문 샵에 주문하는 경우도 많아요. 친구 따라 처음 접했는데, 이렇게 꾸미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재미있고 이런 옷을 입어보는 것 자체도 좋아요.”
코스프레는 유명한 만큼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한때 유행이었던 ‘프리 허그’는 성추행 및 구걸 행위 등이 발생하여 전면 금지되었다. 종종 지나친 노출이나 성적인 포즈, 혹은 무리한 포즈 강요 등의 문제도 발생한다. 주최측은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적발시 일정 기간 참여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번 코믹월드 팜플렛 표지를 장식한 ‘보컬로이드’를 비롯해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흑집사’ 등 최근 매니아들에게 인기있는 작품의 코스프레가 많았다. 꼭 애니나 게임과 관계없이 일본 교복이나 메이드복, 군복처럼 평소 입고 싶었던 옷을 입거나, 자체적으로 만든 옷을 입기도 한다. 평소에는 입기 힘든 옷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코믹월드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코스어들은 다른 코스어의 사진을 찍거나, 다른 코믹월드 행사를 둘러보거나, 잔디밭 등에 앉아 아는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등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스튜디오 애니멀’의 조경훈 대표는 코믹 마켓을 ‘한국 애니판에서 유일하게 생산자와 소비자의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곳’으로 평했다.
“한국의 오타쿠들은 세계에서 일본 애니를 가장 많이 보면서도, 공식적인 루트에 대한 충족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사고 파는 사람 사이의 피드백이 없었다는 거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피력하고, 떳떳하게 구매한 소비자가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곳은 현재로선 코믹 마켓밖에 없습니다.”
조 대표는 또한 한국 애니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로 ‘한정된 팬층’을 꼽았다.
“일본 코믹은 남녀 비율이 절반 정도예요. 연령대는 최소 고등학생 이상에 주류는 20대이고 4, 50대도 옵니다. 그런데 참가자 대부분이 미성년자, 그 중에서도 여자라는 게 한국 코믹의 특수성이에요. 이들도 나이 먹으면 공부해야 된다며 코믹을 끊어버린다구요. 한국 오타쿠들에게 코믹은 인생의 통과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지속적인 시장 창출이 안 되죠.”
동인지는 보통 유명한 작품의 팬 픽션인 경우가 많다. 해당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공유하는 이들이 동인지를 구매한다. 가격은 권당 3-4천원 정도. 유명한 작품들과 관련된 캐릭터 상품을 팔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꽃미남들이 등장하는 작품의 경우, 일반인이 보기엔 다소 뜨악한 동성애 같은 장르가 나오기도 한다. 19세 미만 관람불가인 작품은 철저하게 신분증을 검사한다. 19금 작품이 미성년자에게 유출될 경우 해당 작가는 일정기간 참여가 금지된다.
인기 부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기 때문에, 일반 부스들과 떨어진 위치에 따로 배치되어있다. 인기 작가들의 경우 코믹이 열릴 때마다 백만원 이상을 버는 사람도 있다. 그 중에는 아예 특정 작품과 관계없이 자체 브랜드를 구축한 동인지 작가들도 있다. 다만 자유로운 행사의 특성상 상업적 기업의 참여는 금하고 있다.
가장 열기가 뜨거운 곳은 애니 주제가 현장이었다. 행사 초반에는 애니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무대 앞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열광했다. 잘 부르는 이에게도, 목소리가 원곡에 못 미치는 이에게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일부 참가자들은 해당 애니의 코스프레를 한 채 등장해 더욱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나와 같은 애니나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생겨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스트레스도 풀고요.”
아이를 데리고 코믹 월드 현장을 찾은 부모들은 이런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런 게 왜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오는 거죠.”
하지만 코믹 월드 참가자들의 얼굴은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하루 동안의 꿈 같은 자유를 맘껏 즐기고 있었다. 코믹 월드는 그들에게 ‘열린 해방의 공간’이었다.
“맨날 공부 공부 소리만 듣다가, 이런 데 한번 나오면 가슴 속이 확 뚫리는 것 같아요. 기분 너무 좋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보고 싶은 거 보고. 그래서 저 같은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