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형 증권사 사장 A씨는 얼마전 사무실로 날아온 미국 월가(街)의 30대 후반 금융인 이력서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 프린스턴대 졸업, 펜실베이니아대 로스쿨 졸업, 재무분석사(CFA), 미국 최상위권 로펌 변호사, 모건스탠리 채권분석담당, 미국 10위권 사모투자펀드(PEF) 투자담당임원….
법률·금융부문 지식과 월가 실무 경험을 두루 갖춘 초특급 인재였기 때문이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나기 전인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수억~수십억원을 주겠다고 해도 한국 금융회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1급 인재였다. 그는 최근 월가 금융인들의 몸값이 떨어진 후에도 10억원 안팎의 연봉을 받고 있다. A사장은 "이때가 기회다. 무조건 잡아야겠다"고 맘 먹었다. 연봉 조건을 슬쩍 떠봤다.
과거 외국인 인재를 데려올 때 첫해에 수억원대 보너스를 보장했는데 이 조건은 언급하지 않고, 국내 다른 금융인과 비슷한 연봉 수준을 제시했다. 반응은 "OK"였다. A사장은 요즘 미국에 있는 그와 전화 연락을 하며 막판 채용 절차를 진행 중이다. A사장은 "경력이 너무 화려해 경력에 걸맞은 일감을 찾아주는 게 고민될 정도"라고 했다.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에서 기업인수·합병(M&A) 업무를 하던 한국계 금융인도 올 초 한국의 헤드헌팅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미국 하버드대를 나오고 연봉 300만달러(30억원대)를 받던 사람이다. 하지만 작년 말, 그의 회사에서 M&A조직이 통째로 날아가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작년 9월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월가를 비롯한 선진국 금융업계가 초토화되면서 일류 금융인력이 한국 금융회사에 이력서를 내는 경우가 늘고 있다. 미국 톱 5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홍콩계 보험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40대 초반의 한국계 부사장은 3일 전 한국의 보험사 CEO자리를 찾기 위해 헤드헌팅사의 문을 두드렸다.
글로벌 헤드헌팅회사인 '하이드릭 앤 스트러글스' 김재호 한국법인 파트너는 "미국 아이비리그(미 동부 사립 명문 대학)를 졸업하고 투자은행에서 이름을 떨치던 특A급 금융인들의 이력서가 일주일에 1~2통씩 들어온다"며 "작년 상반기보다 30~50% 저렴한 연봉을 제시해도 데려올 수 있다"고 말했다.
임원급 헤드헌팅 전문업체인 유앤파트너즈 유순신 사장은 "24일 오전에만 호주·유럽·스위스·홍콩·미국 등의 국적을 가진 임원급 외국인 5명으로부터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고 싶다는 이력서를 받았다"고 했다. 유 대표는 "재미·재일 교포는 물론 외국인들로부터도 지원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월가에선 고급 인재들의 '엑소더스(대량 유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금융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작년 4분기에만 미국 금융업계에서 14만80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