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양준혁은 기록의 사나이다. 그는 이미 한국프로야구의 여러 통산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올해만 해도 통산 4번째 2000경기출장과 함께 최다홈런 타이기록(340)을 세우면서 이제 한 개의 홈런만 추가하면 장종훈이 보유하던 최다홈런을 갈아치우게 된다. 양준혁의 기량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그가 타자로서 통산기록을 세울 수 있는 것은 프로선수로서 17년째 시즌을 맞고 있을 만큼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양준혁이 장종훈 처럼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왔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기록을 세웠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고교를 졸업하던 80년대에는 지금처럼 고졸직행 프로선수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고 하물며 그처럼 유망한 선수들은 더더욱 대학행이 필수코스였기 때문에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하지만 양준혁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 후에야 프로에 입단했다. 88학번인 그는 92년 봄에 영남대를 졸업했지만 1년 뒤인 93년에 프로에 데뷔했고 그 해에 신인상을 수상했다. 양준혁은 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오기까지 1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 양준혁은 이 기간 동안 상무에 입대해 군복무를 했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 그렇다면 어떻게 군에 입대하고도 1년 만에 프로팀에 입단해서 신인상까지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잘 알려지지 않은 양준혁의 군복무 스토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92년에 열렸던 신인드래프트 얘기를 꺼내야 한다. 92년 드래프트에서 양준혁은 관심의 초점을 받았던 대학 최고의 강타자였다. 당연히 대구상고(현재는 대구상원고) 출신인 그를 연고팀인 삼성은 1차 지명으로 선택했어야 했지만 당해 대구에는 또 한명의 유망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양준혁과 대구상고 동기였던 계명대의 좌완투수 김태한이었다.

당시 1차 지명 카드 1장을 놓고 삼성은 두 선수를 저울질하다 당시 투수가 부족했던 팀상황을 감안, 김태한으로 최종낙점한다. 그러면서 양준혁은 8개 팀이 순번대로 지명하는 2차지명에 나오게 되지만 아마에 잔류해서 뒤에 삼성의 지명을 다시 받을 것이며 다른 팀에는 지명을 받더라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때의 1순위 지명팀은 두산(당시 OB)이었다. OB는 2차지명 직전까지 양준혁과 물밑접촉을 시도하지만 양준혁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하고 결국 이상현과 권명철이라는 투수 두 명을 선택하게 된다(당시 전년도 7, 8위팀에게는 두장씩의 우선지명권이 있었다).

다음 팀은 지금은 사라진 쌍방울. 쌍방울도 양준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지명을 하고 나면 그의 결심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실제 지명에서 양준혁을 1순위로 지명하고 만다.

당시 양준혁은 친구인 김태한과 함께 뛰기 위해서 몇 년이 늦어지더라도 삼성에 꼭 입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쌍방울의 입단제의를 거절하게 되는데 이미 옛날 얘기니까 확 까놓고 얘기하자. 당시 양준혁과 삼성간에는 모종의 밀약이 있었다. 이는 뒤에 양준혁이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될 때 스스로 밝혔던 부분.

결국 프로행을 거부한 양준혁은 상무에 입대하게 된다. 상무의 시스템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실업리그에 참여하던 순수아마팀이었고 양준혁은 신체검사에서 현역이 아닌 방위판정을 받았음에도 방위신분으로 상무에 입단이 가능했다.

일단 당시의 방위복무기간인 18개월이라면 양준혁이 다시 신인드래프트에 나오려면 제대한 후 6개월이 지난 94년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삼성은 93년 드래프트에서 아직 제대가 6개월이나 남은 그를 지명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거쳐 1차지명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준혁은 수도권에 위치하던 상무를 1년만에 퇴단하고 대구로 주소를 옮겨 방위병생활을 계속한다.

어떻게 상무라는 군기관의 퇴단이 쉽게 가능했으며 방위복무중에 주소를 옮겨 근무지를 바꾸는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부분은 그냥 미스테리로 남겨뒀으면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방위병이 프로야구에 출전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하던 시절이다. 홈경기는 근무시간을 조정해서 100% 출전이 가능했고 원정경기도 휴가를 이용해 상당부분 이동이 가능했던 시절,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시스템이지만 양준혁뿐만이 아니라 모든 방위복무 프로선수들이 그러했고 이런 관행은 95년 이른바 방위병 출전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양준혁은 93년 프로에 데뷔해서 7월중순까지 군인신분이었음에도 전례가 없던 최고의 신인성적을 기록했다. 아무래도 원정경기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약 20경기에 빠진 106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 0.341, 23홈런, 90타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며 그 해 함께 데뷔한 이종범, 이상훈, 김경원 등을 제치고 신인상을 획득한다. 홈런왕을 차지했던 같은 팀의 김성래가 없었다면 프로야구 최초의 MVP와 신인상 동시석권은 류현진보다 13년이전에 이미 탄생했을지도 모를 대단한 성적이었다.

현역군인으로 프로에 입단한 경우는 양준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양준혁의 사례 이후 2차지명을 거부한 선수는 3년 뒤에 다시 지명자격을 얻는 것으로 규정도 변경되었다.
양준혁이 92년 프로에 입단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누적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뒤에 군대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방위복무였다면 얼마든지 선수생활을 해가면서 해결했을테니까...)

92년 양준혁의 선택. 어찌보면 잃어버린 1년의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고 2년의 공백을 각오했다가 1년만에 프로팀의 옷을 입었으니 다시 찾은 1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만해도 프로야구 초창기라 여러 가지 제도적 허점이 있었던 시절. 위풍당당 양준혁은 그 입단서부터 여러 가지 해프닝을 만들어낸, 남달랐던 선수였다.

▶ 최형석은 누구?

실업야구시절부터 한국프로야구의 시작,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30년 넘게 한국야구를 지켜온 열혈야구팬이다. 현재는 아마야구선수들과 프로팀 스카우트, 야구팬 등 약 7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커뮤니티 온라인 천리안아마야구사랑의 운영을 맡고 있으며, 마이크로탑10이라는 뉴스레터 발간사이트를 통해 약 2400명의 희망구독자에게 매일아침 프로야구에 관한 주요뉴스와 개인적인 소견을 정리하여 발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