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남자부 KEPCO45(한국전력·이하 한전)의 신인 센터 최석기(23)에게 올 시즌은 배구선수 생활 9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소속팀 한전은 프로배구 사상 한 시즌 최다연패(連敗) 기록을 '17'에서 '25'로 갈아치웠고, 시즌 내내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전의 올 시즌 성적은 4승31패. 10%를 간신히 넘는 승률(11.4%)이고, 아마추어 초청 팀인 신협상무(5위·8승27패)에도 못 미친다. 최석기는 한양대 재학 시절 특급 센터로 이름을 날렸고, 3연패 이상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다. 대학 후배들이 가끔 '선배팀은 언제 이겨요?'라는 문자를 보내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최석기는 "17연패를 당했을 때엔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최석기는 지난 2월 21일 다시 울었다.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었다. 한전은 이날 신협상무를 3대1로 꺾고 25연패 늪에서 벗어났다. 경기가 끝나자 한전 코칭스태프와 선수 모두 우승이라도 한 듯 서로를 얼싸안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첫 승을 거두기 사흘 전 공정배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팀을 맡은 지 11년 만에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전은 1945년 창단된 이래 한번도 시즌 도중 감독을 바꾼 적이 없었다. 3명의 감독이 64년 동안 팀을 이끌어왔다.
지금까지 공기업 한전에서는 없었던 채찍질에 선수들도 충격이 컸다. 공격수 이기범(23)은 "감독님이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다"며 "나도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선수들은 이를 악물었고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승리를 따내기 시작했다. 프로로 전환하면서 생긴 승리수당 300만원도 손에 쥐기 시작했다.
한전은 첫 승의 기세를 몰아 지난달 5일 단독 선두를 달리던 현대캐피탈을 3대1로 잡는 이변을 일으켰고 22일 LIG손해보험, 24일 삼성화재까지 차례로 물리치며 올 시즌을 마쳤다. 차승훈 감독대행(코치)은 "선수들이 연패에서 탈출한 후 자신감을 되찾았다"며 "시즌 막판 선전으로 2주로 예정됐던 선수들의 휴가도 3주로 늘었다"며 빙긋 웃었다. 수원 홈경기장을 찾은 팬도 지난 시즌보다 43.9%나 늘었다. 한전 배구단 이권철씨는 "지난 시즌 9663명이었던 홈경기장 관중이 올 시즌 1만3905명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한전은 다음 시즌에 기대를 건다. 신인 6명이 혹독한 프로 신고식을 치르며 경험을 쌓았고, 고참 선수들과의 호흡도 점점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무에서 뛰던 '여우 세터' 김상기가 5일 복귀하면 특유의 지능적인 토스로 팀의 공격력이 강화될 것이다. 한전은 외국인 선수의 영입까지 추진하고 있다. 임대환 단장은 "다음 시즌엔 팬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