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1대 임금 문종의 아들로, 형 순종(12대), 형 선종(13대), 선종의 아들인 조카 헌종(14대)에 이어 15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숙종(肅宗)은 조선 임금들 중에서 이름이 같은 숙종보다는 세조(世祖)의 정치 역정과 흡사하다.
1094년 5월, 11년 동안 재위했던 선종이 죽고 선종과 사숙태후 이씨 사이에서 난 11살의 헌종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사'는 헌종에 대해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워 9세부터 이미 서화(書畵)를 좋아하였으며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임금의 자질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1살은 너무 어렸다. 결국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사실상 수렴청정에 나섰으나 국정이 안정되지 못했다.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 집안으로 이자연의 아들 이석의 딸이었다. 게다가 선종은 이자연의 아들 이정의 딸도 후궁(원신궁주)으로 맞아들였다.
둘 사이에서 난 왕균은 한산후에 봉해진다. 헌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 7월 원신궁주의 친오빠인 이자의(李資義)가 왕균을 추대할 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가 계림공 왕희(훗날의 숙종)에게 제압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이 영의정 맡듯…
내친김에 계림공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전면에 나선다. 일단 8월에 헌종은 숙부인 계림공 희를 중서령(조선의 영의정에 해당)에 임명한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 영의정을 맡은 것과 똑같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0월 12살 헌종은 선위(禪位)를 명한다.
"내가 보기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神人)이 모두 다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겉으로는 병약(病弱)을 내세웠지만 사실상의 강제 퇴위였다. 헌종은 강조에 의해 쫓겨난 7대 목종에 이어 두 번째로 폐위된 셈이다.
숙종의 즉위 과정은 따라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고려사' 숙종조에는 아버지 문종이 그를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아마도 네로구나!" 하고 말했다는 기사까지 실려 있다.
그리고 곳곳에 숙종의 즉위가 자발적 선위가 아니라 쿠데타에 가까운 왕위찬탈이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들이 나온다.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첫 번째로 내린 조치는 원신궁주와 한산후 형제들을 지금의 함경도 경원군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었다. 인주 이씨와 왕실의 권력 투쟁이 문제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고려사 "수백명 품계 마구 올려줘"
조선왕조실록만큼 자세하지는 않지만 '고려사'는 숙종의 즉위 직후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품계의 순차를 뛰어 올려 벼슬을 갈아준 자가 수백명이요, 공인바치·상인·천인들까지도 이를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준 자가 있었으나 해당 관리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혁명에 준하는 사태가 일어났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42살이었고 10년 재위하며 실제로 흔들리던 왕실을 바로잡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참고로 조선의 세조가 정난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를 때가 39살이었고 13년3개월 재위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52살에 세상을 떠난다. 숙종의 성품에 대해 '고려사'는 "어려서 총명하더니 자라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도량이 크고 기질이 굳세며 매사에 과단성이 있었고 오경자사(五經子史) 등 수많은 서적을 아니 읽은 것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세조처럼 문무(文武兼全)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천도론을 바탕으로 남경에 궁궐까지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남은 것은 왕위에서 물러난 헌종의 처리 문제였다. 상왕(上王)으로 모시든가 공(公)으로 강등시키는 게 아니라면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라날수록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조선 단종의 경우 왕위에서 물러난 지 2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헌종 "죽었다"는 기록뿐… 독살 가능성
헌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지 4개월 후인 1096년(숙종 1년) 2월 궁궐을 나가 거처를 흥성궁(興盛宮)으로 옮긴다. 흥성궁이란 아버지 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사저(私邸)였다.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난 1097년 윤2월19일 '고려사'에는 "전 임금이 죽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겉으로는 병사(病死)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포장일 뿐 독살(毒殺)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서는 조선 세조보다 고려 숙종이 한 수 위였다고나 할까? 세조는 공식적으로 사약을 내림으로써 두고두고 비난을 받은 반면 숙종은 적어도 그런 악평은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말 대학자 이제현은 이 때 숙종의 왕위찬탈과 관련해 이런 사평(史評)을 남겼다. "우리 고려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서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 받은 데 견문이 익숙해서 (선종이 세상을 뜨자마자) 대번에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여 잘못으로 여겼다. 그것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다만 어린 헌종의 근친 중에 주공(周公)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藿光)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라 일을 맡겨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 운명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 어린 임금에게 왕업을 맡기게 될 때에는 이 일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095년의 사건은 정확히 360년 후에 그대로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