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빚어진 냉혹한 국제정치의 삼각파도 속에서 '민족 자결'의 희망을 피어 올린 자유의 횃불이었다. 1차 대전이란 쓰나미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준비하던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전쟁 준비를 초토화시켰다. 1914년 연해주에서 추진된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계획의 실패가 단적인 예였다.

연해주 한인(韓人) 이주 50주년 기념을 표방한 이 계획은 실제로는 러·일전쟁 패배 10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대일(對日) 적대감을 활용하여 러시아와 손잡고 만주의 동포사회가 연합하여 30만 독립군을 무장시켜 조국을 해방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헤이그 밀사의 한 사람이었던 이상설(1870~1917)이 있었다. 그러나 그해 7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외에 아시아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에 의해 이상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고 이 계획은 무산됐다.

이상설은 1915년 생애 마지막 비장의 계획을 꺼내 들었다.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광무 황제를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시켜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고,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독일과 연대하여 일본에 대항한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도에 발각됐고, 이상설은 비관 속에서 병을 얻었다. 그는 망국(亡國)의 죄인으로서 모든 유품을 태워버리라는 피맺힌 유언을 남기고 우스리스크 근처 수이푼강에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1917년 11월 유럽 동부전선 연합국의 중요한 축이었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연해주는 혁명파인 적군(赤軍)과 백군(白軍)의 내전에 휩싸였다. 연해주 동포들은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백군에 맞서 적군 편에 서서 피 흘리며 싸웠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독립운동가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참가한 독립운동가들. 김규식(앞줄 오른쪽) 임시정부 외무총장, 여운홍(여운형 동생·앞줄 왼쪽), 이관용(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파리위원부 부위원장, 조소앙(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황기환(뒷줄 오른쪽) 서기장.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차 대전의 막바지에 러시아 혁명의 극동지역 파급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아시아 주둔 독일군의 유럽 집결을 막기 위해 연합국의 국제 원정군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다. 그 주력이 일본군이었다. 연해주 한인들은 이제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싸워야 했다. 항전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연해주 동포들은 국내 해방운동에 끼어들 여력이 없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재를 뿌린 것이 1차 대전이었다면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 것도 1차 대전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전쟁을 반대하고, 모든 민족에 대해 민족자결권 보장을 선포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도 이에 맞서 1918년 1월 8일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 선언을 발표했다. 1차 대전은 점차 군국주의적 군주국가 대 민주국가의 대결로 변해갔다. 이들은 전략상 서로 적국 치하 식민지 민족에 독립을 부추겼다. 소비에트 정권에 이은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민주진영의 승리,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발틱 3국·아랍 여러 민족의 독립으로 세계는 바야흐로 '해방' '독립' '민주주의'의 새 시대가 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독립선언서에서 "아,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라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윌슨은 1차 대전이 끝난 뒤 14개조 선언을 파리강화회의에 적용하고자 했다. 3·1운동은 이 기회에 한민족의 독립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반영시키고자 한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전국에 가세한 일본의 식민지 해방은 논외였다. 일본은 집요한 공작 끝에 오히려 만주와 몽골에 대한 이권을 손에 넣었다. 서방세계는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외면한 채 일본을 키웠으나 훗날 태평양전쟁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인을 자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3·1운동은 단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광무 황제의 급서와 독살설(說)이 민족 정서에 기름을 끼얹었고, 수십만명이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든 것도 좋은 여건을 형성했다. 무엇보다 민족의 운명에 책임을 느끼는 각성된 개개인이 전(全)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