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영 전 경찰청장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신임 사장 공모에 허준영(57) 전 경찰청장이 응모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철도계가 속앓이를 하고 있다. 허 전 청장은 지난 2월 10일 코레일 임원추천위원회 면접심사에 11명의 다른 지원자와 함께 출석했으며, 1단계 합격자 5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앞으로는 기획재정부가 이들 5명에 대한 추가 심사를 벌여 최종 후보를 2~3명으로 압축, 국토해양부를 경유해 청와대에 최종 결정을 의뢰하게 된다.

현재 코레일 사장 자리는 지난해 11월 강경호 사장이 강원랜드의 한 직원으로부터 인사청탁 대가로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비어있는 상태로, 심혁윤 부사장이 사장직을 직무대행하고 있다.

정부는 작년 12월 후임 사장 선정을 위한 공모에 나섰다. 그러나 지원자 가운데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무산시킨 뒤 현재 2차 공모에 나선 상태다. 이번 재공모 응모자 12명은 전 철도기술연구원장 등 대부분 철도 혹은 교통분야 전문가들이다.

 "공모 신청, 최상부와의 교감 없인 불가능"

철도계 인사들은 철도는 물론 교통 분야와도 관련 없는 허 전 경찰청장의 응모 사실 자체를 놓고 "윗선과의 강력한 사전 교감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며 "사실상 내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반발하고 있다.

수뢰 혐의로 구속된 강경호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현대그룹에서 함께 일한 경력 때문에 'MB맨' '현대맨'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 사장으로 임명돼 5년이나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게다가 2005년부터는 세계대중교통협회 아태지역 의장직도 맡아왔다.

이렇게 본다면 1995년 이후 십수년간 철도계 수장으로서 '외부인'은 이철 전 의원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철 전 사장의 경우 유력 정치인에게 공기관 대표를 맡기는 일이 흔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철도계 내부의 반발이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 허 전 경찰청장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허 전 청장은 사실상 평생을 경찰에서 근무했다. 1980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뒤 4년 후인 1984년 고시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경찰계에 투신해 부산 남부경찰서를 시작으로 일선 경찰서를 두루 거쳤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는 청와대 정무수석실 치안비서관에서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경찰청장까지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2005년 말 여의도에서 벌어진 농민시위를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자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퇴임 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물러날 일이 아니었다"며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허 전 청장은 이후 회고록인 '허준영의 폴리스 스토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고 현재는 민간 보안업체의 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허준영 전 경찰청장, 2005년 말 퇴임당시의 모습

농민시위로 낙마 후 총선 출마도 나경원에 밀려

철도계에서는 정권이 허 전 청장을 코레일 새 사장으로 사실상 내정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를 비롯해 어디론가부터 '확실한 언질'이 있지 않고서야 응모했을 리 없지 않냐는 것이다. 허 전 청장은 정권이라는 변수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운신의 폭을 넓혀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 정권 때 권력 핵심의 하나인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을 지냈지만 17대 대선 때는 한나라당의 중앙선대위 직능본부 행정자치위원장을 지내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그는 이 같은 경력을 토대로 18대 총선 때 서울 중구에서 한나라당 예비후보자로 입후보했지만 뜻을 접어야 했다. 중구에 인지도 높은 신은경 전 아나운서가 남편인 박성범 전 의원을 대신해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한나라당에서 맞불 상대로 나경원 의원을 전략 공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모로 '불이익'을 당한 허 전 청장에 대해 정권이 적잖은 부담감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말하자면 '보은설'인 셈이다. 공기관인 코레일 사장에 대한 실질적이고 최종적인 인사권은 이명박 대통령이 갖고 있다.

허 전 청장은 작년 6월에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에 응모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도 전체 응모자 18명 가운데 이채욱(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이재희(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씨와 함께 최종 후보 3인에 들었었다. 그러자 민주당이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최재성 대변인은 현안브리핑을 통해 "허준영씨가 무슨 전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며 "용서하기 어려운 낙하산 인사의 절정"이라는 비난 성명을 냈다. 당시 정권은 이 같은 여론 악화의 부담을 우려, 허 전 청장을 사장으로 결정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바닥까지 떨어진 경찰 사기 진작용' 해석도

일각에서는 정부가 허 전 청장을 새 코레일 사장으로 내정한 더 큰 이유로 '바닥에 떨어진 경찰 사기 진작용'이라는 해설도 내놓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 29일 어청수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작년 한 해를 휩쓸다시피한 '촛불시위 사태'와 관련해 전체적 대응이 미숙했다는 여론을 의식한 최종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후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까지 최근의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과 관련해 '도의적 책임'을 안고 불명예 퇴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됐다. 2003년 경찰청장 2년 임기제가 실시된 이후 임기를 다 채운 총수는 한명도 없다. 때문에 바닥까지 떨어진 경찰 전체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역대 경찰청장 가운데 신망이 두텁고 능력도 인정받는 편인 허 전 청장을 중용할 필요를 느낀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허 전 청장은 경찰청장 재직 당시 업무처리와 대인관계가 원만해 부하들로부터 '영국신사'란 별명을 들었다. 2005년 12월 그의 퇴임식장에서는 일부 경찰 후배들이 사퇴에 반대하며 '경찰 전체가 죽는 날'이라는 의미로 검은 리본을 달고 나오기도 했다.

철도계 "왜 하필 우리를 희생양 삼나" 분노

하지만 철도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투자 모든 면에서 대대적 혁신을 꾀해야 할 '철도 르네상스'의 시대를 앞두고 비전문가를 낙하산 식으로 투입한다면 발전은커녕 퇴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코레일의 한 간부는 "보은이건 경찰 사기가 진작이건 다 좋다. 하지만 그런 일에 철도를 희생양 삼아선 곤란하다. 경찰에만 사기가 있고 3만 코레일 직원과 한국철도는 아무래도 좋단 말이냐"고 했다.

허 전 청장은 그러나 '보은설' 혹은 '경찰 사기 진작설' 등을 부인했다.

그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평소 항공이나 철도 같은 교통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공모 공고를 보고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해 지원을 결정했을 뿐, 위로부터의 언질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또 "나는 항상 스페셜 제너럴리스트(모든 일을 두루 잘 하는 사람)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며 "직업경찰 10만명 조직을 이끈 경력과 경찰청장 퇴임 후 민간기업 CEO로 일한 경험을 두루 살려 코레일과 철도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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