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년 2월 2일 칠레 해안에서 650㎞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마사 티에라 섬 근처를 항해하던 영국의 해적선 듀크호 선장은 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몇 시간 뒤에 부하들은 염소 가죽을 온몸에 두른 맨발의 남자를 붙잡아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개해 보이는 그는 한참 동안 말을 더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본 게 4년4개월 만에 처음이라고.
그가 바로 훗날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의 모델이 된 스코틀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셀커크(Selkirk)다. 셀커크의 무인도 탈출 3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선 현장 조사와 발굴 작업을 통해 셀커크의 무인도 생활이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인터넷판이 6일 보도했다.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콜드웰(Caldwell) 박사는 최근 마사 티에라 섬(1966년 로빈슨 크루소 섬으로 개명) 답사를 통해 셀커크가 머무른 곳으로 추정되는 동굴 야영지를 발견하고, 거기서 길이 1.6㎝의 청동 조각을 찾아냈다. 이 조각은 항해 도구의 일부분으로 셀커크가 섬에서 목각 인형과 도구들을 만들다 떨어져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콜드웰 박사는 설명했다. 성분 분석 결과 이 청동은 영국 콘월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하지만 셀커크와 소설 속 크루소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인물이었다. 우선 크루소가 난파를 당한 모험가였던 것과 달리, 셀커크는 동료들과의 불화를 이유로 무인도 유배형에 처해진 해적이었다. 또한 크루소에겐 동료이자 노예인 '프라이데이'가 있었지만, 셀커크는 철저히 혼자였다. 크루소가 가끔씩 섬에 나타나는 식인종들을 두려워한 반면, 셀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 해적들이 상륙하는 것을 겁냈다. 이 밖에 셀커크는 크루소와 달리 염소 사냥에 열중했다. 16세기에 스페인 탐험가들이 이 섬에 들려 염소를 방목한 적이 있었는데, 셀커크가 유배 생활을 할 즈음엔 그 수가 수백 마리로 불어났다. 셀커크는 의복과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염소 500마리를 잡았으며, 사냥에 성공할 때마다 이를 기록에 남겼다.
구조된 뒤의 삶도 전혀 달랐다. 소설에서 영국에 행복하게 정착한 크루소와는 달리, 1711년 영국에 돌아온 셀커크는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지만 무인도 생활을 못내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뱃사람이 됐고 1721년 12월 12일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
셀커크가 무인도 생활을 기록한 일기장은 행방이 묘연하다. 콜드웰 박사는 셀커크의 글들이 그의 사후(死後) 스코틀랜드의 유지였던 해밀턴 공작에게 넘어갔으며, 이 글들은 공작의 후손들이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처분했다고 설명했다. 콜드웰 박사는 당시 주요 낙찰자가 독일인들이었다는 점을 들어 셀커크의 일기가 베를린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