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에 있는 맞춤양복점 '세기테일러'는 '대통령의 양복점'으로 불린다.

40년 전부터 외길을 걷고 있는 윤인중 연구원장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양복을 도맡아 만들었다 해서 생긴 별칭으로, 이곳에서는 아직도 역대 대통령의 옷본을 보관하고 있다.

세기테일러는 요즘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다. 30대 초반의 아들 윤일석 씨가 가업을 잇겠다고 나선 것. 건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LCD 제작회사에서 기획업무를 하던 윤씨는 2007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세기테일러에 합류했다.

“제가 일곱 살 때 웅변대회를 나갔는데 아버지께서 벨벳으로 양복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 때부터 아버지가 멋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 일을 물려받고 싶다는 생각도 그 무렵부터 한 것 같습니다.”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 윤씨는 경영학과 디자인 중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하던 시기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아버지가 벌이던 대규모 맞춤복 시스템 사업도 큰 위기에 처했다. '사업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고 절감한 윤씨는 디자이너 대신 경영학도의 길을 택했고, 일반 기업에서 4년간 경영 시스템을 익혔다.

부자의 역할 분담은 뚜렷하다. 아버지의 직함은 연구원장, 아들의 직함은 대표. 아버지는 장인의 고집으로 최고의 옷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아들은 시장의 트렌드를 분석해 마케팅에 집중한다. 아들은 고객들이 이곳에서 맞춘 양복을 입은 사진을 수시로 블로그에 올리면서 '정통 클래식 슈트는 아버지 세대의 옷이 아니다, 진정한 멋을 아는 젊은이들과도 함께하는 패션이다'라는 걸 강조한다. 젊은 패셔니스타(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유행을 이끄는 사람)들을 단골로 만들겠다는 것. 세기테일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부자는 입을 모은다.

"남성정장 세계 3대 명품은 브리오니, 체사레아톨리니, 키톤입니다. 모두 이탈리아 브랜드죠. 전통 클래식 슈트의 기본 형태는 영국에서 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국 브랜드는 하나도 없어요. 무조건 옛것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한 겁니다."(윤인중 원장)

"변하지 않으면 안 돼요. 클래식 슈트라고 해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지 안 그러면 도태되죠. 한국 남성 체형을 잘 살려 착용감도 좋고, 세계적인 디자인 트렌드를 반영한 옷을 만드는 게 관건입니다."(윤일석 대표)

윤 대표는 얼마 전 600만 원을 주고 체사레 아톨리니 정장을 맞췄다.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체하기 위해서다. 그는 "낱낱이 뜯어 보고 배울 부분이 있으며 적극 수용하고, 우리가 더 경쟁력 있는 부분은 자신 있게 지켜 나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윤일석 대표가 합류하면서 고객층도 확 달라지고 있다. 기존 고객이 주로 50~60대였다면 최근엔 30대 고객이 급격히 늘었다. 윤 원장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는 사농공상의 잔재가 있어서 골무 들고 꿰매는 걸 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달라요. 이 아이 또래 고객이 오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으니 얼마나 영광이냐'고 하며 부러워하죠. 또 우리 세대 아버지들은 뚜렷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패션 감각이 상당하고 자기 스타일이 뚜렷해요. 맞춤양복에 대한 전문용어와 원단까지 꿰는 마니아들도 상당합니다."

세밀한 재단과 손바느질이 경쟁력

세기테일러는 비스포크 슈트를 지향한다. 클래식맞춤 슈트의 최고봉인 비스포크(bespoke)는 'beenspoken for'의 줄임말로, '고객이 말한 대로 만드는 옷'이라는 뜻이다. 고객의 신체 한 부분 한 부분을 세밀하게 재단해 거의 전 공정을 손바느질로 만든다. 윤인중 원장은 "슈트는 시계나 가방 등과는 달라서 아무리 명품이라도 내 몸에 맞지 않으면 브랜드 가치가 허망하다"고 말한다.

"남성 슈트야말로 인체공학적인 설계를 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신체 치수가 다른 것은 물론, 신체 부위마다 비대칭적인 곡선으로 돼 있습니다. 정확한 치수를 재기 위해 호흡까지 멈추죠. 어깨부분을 얼마나 편하게 만드는 지가 남성복의 관건이자 그 회사의 실력을 보여주는 가늠자입니다.재킷 무게가 평균 650g인데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300g으로도, 1000g으로도 느껴질 수 있거든요."

세기테일러에서는 어깨 부분에 들어가 옷의 형태를 유지해 주는 캔버스를 모두 손바느질로 만든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라고 해도 기계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각기 다른 두께와 재질의 감을 네 겹 겹쳐서 만드는 캔버스의 어디를 어떤 방향으로 바느질하느냐에 따라 활동성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곳에서는 활동성을 좋게 하기 위해 암홀 부분과 가까운 부분은 바느질하지 않는다.

이날 부자는 둘 다 나폴리 스타일의 슈트를 착용했다. 나폴리 스타일이란 이탈리아 남부에서 부흥한 스타일로, 장인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핸드메이드로 만드는 옷이다. '옷 중의 옷' '남성 슈트의 결정판'으로 옷 마니아들의 로망처럼 인식된다.

이 스타일의 특징은 어깨에 두꺼운 패드를 넣지 않아 어깨선이 자연스럽고, 상의 왼쪽 주머니를 배의 밑면처럼 둥글게 처리해 입체감을 주며, 소매 끝 단추가 단순 장식이 아닌 리얼 버튼으로 돼 있다. 바지는 지퍼 대신 버튼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고, 바지폭은좁으며, 길이가 발목 복사 뼈까지 올 정도로 짧은 게일반적이다. 여기에 브라운 계열의 구두를 신는다.

윤인중 원장은 어려서부터 오리고 자르는 걸 좋아했다. 충청도 집에서 일부러 서울로 올라와 대한복장학원에 입학했고, 이 학원을 수석 졸업했다. 학원 원장은 그에게 "수천 명 졸업생 중에 자네 같은 학생은 처음 보네. 자넨 천재야"라고 평했다 한다.

졸업 후 광교에 있는 맞춤양복점 중 실력 있기로 소문난 '세기테일러'에 입사했고, 여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양복을 만들어 주면서 그의 감각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0년 롯데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그에게 입점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아이가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배웠는데, 내가 가진 손 솜씨까지는 아직 전수하지 못했어요. 세대교체의 시한을 4~5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윤인중 원장)

"어깨가 무겁습니다. 능력이 된다면 대대로 이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롤 모델로 삼는 회사는 쇠퇴하고 있는 영국 세빌로의 양복점도 아니고, 조르지오 아르마니 같은 대규모 패션업계도 아닙니다.

체사레 아톨리니입니다. 직원 수가 1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이 회사는 대중적인 브랜드는 아니지만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명합니다. 규모는 작더라도 최고의 품질을 지켜 나가고 싶습니다."(윤일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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