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하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이사장이 생존해있는 전직 총리 20명에게서 받은‘초등학 교 한자교육 촉구’서명부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각각 받은 서명을 한곳에 모았다.

대한민국 역대 국무총리 중에서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21명이다. 이 중 와병 중인 제15대 유창순(劉彰順·91) 전 총리를 제외한 20명의 전직(前職) 총리들이 모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건의서가 있다. 정치적 성향과 연배가 서로 다른 이들이 빠짐없이 찬성한 건의서는 무엇일까?

이들이 서명한 문서는 '대통령께 드리는 역대 전(全) 국무총리의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촉구하는 건의서'다. 건의서 만든 사람은 진태하(陳泰夏·70) 사단법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이사장(인제대 석좌교수)이다.

최근 청와대에 제출된 건의서에는 제11·31대 김종필(金鍾泌·83) 전 총리부터 14대 남덕우(南悳祐·85), 18대 노신영(盧信永·79), 20대 이현재(李賢宰·80), 21대 강영훈(姜英勳·87), 22대 노재봉(盧在鳳·73), 23대 정원식(鄭元植·81), 24대 현승종(玄勝鍾·90), 25대 황인성(黃寅性·83), 26대 이회창(李會昌·74), 27대 이영덕(李榮德·83), 28대 이홍구(李洪九·75), 29대 이수성(李壽成·70), 30·35대 고건(高建·71), 32대 박태준(朴泰俊·82), 33대 이한동(李漢東·75), 34대 김석수(金碩洙·77), 36대 이해찬(李海瓚·57), 37대 한명숙(韓明淑·65), 38대 한덕수(韓悳洙·60) 전 총리까지 제3공화국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역대 총리들이 서명했다.

진태하 이사장은 "유창순 전 총리는 우리 단체의 고문 중 한 분이기 때문에 사실상 전직 총리 21명이 모두 뜻을 하나로 모은 셈"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서명을 받는 데는 2007년 말부터 꼬박 1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진 이사장은 서명을 부탁하는 서신을 붓글씨로 정성껏 써서 몇 차례 보냈다.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하는지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전통문화의 계승과 국어의 정상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김종필 전 총리와 이회창 전 총리 등 직접 찾아가 만난 몇 사람은 한 번에 흔쾌히 서명을 해줬다. 김 전 총리는 "한자 없이 우리가 어떻게 전통을 계승하겠느냐"며 기뻐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한참 동안 반응이 없는 경우에는 다시 편지를 썼다. 다섯 번까지 편지를 보낸 끝에 서명을 해 준 사람도 있었다. 그의 끈질긴 청탁과 설득이 결국 스무 명 모두에게 통한 것이다. 진 이사장은 "서명한 글씨를 보니 전직 총리들 중에 달필(達筆)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김종필 전 총리였다"고 말했다.

제일 애를 먹은 사람들은 재임 기간이 가장 최근인 한명숙(2006.4~2007.3), 한덕수(2007.4~2008.2) 두 사람의 전직 총리였다. 한덕수 당시 총리는 "현직에 있으면서 서명하기는 곤란하다"고 고사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지난해 초 제18대 총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서명을 해 줄 수가 없을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고 낙선한 다음에는 한동안 외국에 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노무현 정부 때의 총리인 이해찬·한명숙·한덕수 전 총리가 모두 서명했다. 진 이사장은 "나도 좀 뜻밖이었다"며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모두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진 이사장은 40년 넘게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문 교육에 힘써 왔다. 국한문(國漢文) 혼용과 한자교육 부활을 주장하며 한글학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에는 1998년 출범 초기부터 참여했다. 2007년에는 '毛澤東'을 '모택동'이 아닌 '마오쩌둥'으로 쓰고 있는 현 원음주의(原音主義) 표기에 반대하는 토론회를 열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건의서에는 "한국은 일상생활의 모든 기록을 한자로 매개수단을 삼는 중국과 유치원에서 '논어'를 배우고 있는 일본 사이에 있다"며 "한자의 활용을 배척하고 '한글 전용(專用)'을 고집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자교육을 등한시한 결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반문맹(半文盲)이 돼 있습니다." 진 이사장은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전국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이 거의 다 사장(死藏)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도서관 책들 중에 한글로만 쓰인 책은 5%도 되지 않습니다. 이걸 학생들이 읽지 못하는 거예요."

글자란 학문이 아니라 도구이며 초등학교 6년 동안 단계별로 한자 900글자를 가르치면 전혀 부담 없이 배울 수가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가장 글자를 잘 익힐 수 있는 6~13세 때를 다 놓치고 대학 가서 한자 교육을 받게 한다고요? 그건 다 커서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