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최신호(내년 1·2월호)는 "차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국가안보보좌관"이라고 했다. 이 참모는 대통령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인물로, 국방·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총망라해 조언하고 조정하는 중책을 맡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16명의 국가안보보좌관 중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대통령이나 각 부처 장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며, 권력에 중독되지 않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아이보 달더(Daalder) 외교정책 선임 연구원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차기 행정부를 향해 "대통령과 국가안보보좌관의 신뢰가 효율적 외교정책 집행의 열쇠"라며 "전임자들의 성패 사례를 연구하면 길이 보인다"고 조언했다.

국가안보보좌관 직책이 생긴 건 존 F 케네디(Kennedy) 대통령 때. 그는 CIA(중앙정보국)와 장관들의 말만 듣고 아이젠하워 전 행정부 때 수립된 쿠바의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했다가 대실패(fiasco)를 겪은 뒤 외교·안보문제를 직접 챙기고자 했다. 이에 따라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하버드대 학장 출신의 맥조지 번디(Bundy)는 각 기관들의 정보에 직접 접근해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을 제시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슬기롭게 대처한 것도 번디가 관장하는 국가안보보좌관실의 조언 덕이 컸다. 하지만 후임인 린든 존슨(Johnson) 대통령은 국내문제에 치중하고 외교문제는 국무장관에게 일임했다.

닉슨(Nixon) 대통령 때 헨리 키신저(Kissinger)가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으면서 백악관 중심의 외교정책 수립체제가 완성됐다. 하지만 국가안보보좌관실의 정보가 언론에 자꾸 새나가자 닉슨은 보좌관실 기능을 축소하고 키신저와 단둘이 외교정책을 논했다. 소련과의 비밀 대화 채널 가동, 중국과의 핑퐁외교 등 혁혁한 성과도 냈지만 다른 전문가들이 소외되면서 정책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콘돌리자 라이스, 제임스 존스 지명자.

최고의 국가안보보좌관은 키신저의 후임이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Scowcroft)였다. 포드(Ford) 대통령에 이어 아버지 부시(Bush)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면서 그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동유럽 민주화, 걸프전 승리 등을 차례로 이끌었다.

카터(Carter) 행정부 때 즈비그뉴 브레진스키(Brzezinski)는 대통령과의 불화 때문에 빛을 못 봤다. 카터는 대소(對蘇) 강경론을 펴는 브레진스키보다는 온건파인 사이러스 밴스(Vance) 국무장관을 더 신뢰했다. 결국 소련의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의 이슬람혁명과 미 대사관 인질사건 등 최악의 외교 실책(失策)이 이때 집중됐다.

로널드 레이건(Reagan) 대통령도 국가안보보좌관 보다는 장관들에 더 힘을 실어줬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법을 어기고 적국인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공산 정권의 반군을 지원한 사건) 등 대형 사고가 잇따라 터졌다.

조지 W 부시(Bush) 행정부 1기 때 콘돌리자 라이스(Rice)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딕 체니(Cheney)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Rumsfeld) 국방장관 등 거물들의 위세에 눌려 조정 역할을 거의 못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때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