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는 최근 몇몇 아파트 외벽의 도시가스 배관을 손으로 잡기 힘든 울퉁불퉁한 소재로 씌워주는 사업을 추진했다. 강남구 일대에서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가 물건을 터는 도둑들이 있다는 보도와 시민 제보를 듣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구상 단계에서 중단돼 버렸다. 선거법상 (구청장의) 기부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역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 때문이었다.

대전시는 지난 10월 에너지 절약과 환경오염 방지를 위해 '공용자전거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출발지 대여소에서 빌려 탄 뒤 목적지 근처 대여소에 반납하면 되는 획기적 제도다. 현재 1000대를 시험 운행 중으로 2010년까지 총 2만대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대전시는 이 자전거들을 시 예산으로 구입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무료 운행일 경우 기부행위 제한에 해당된다는 선관위 유권해석으로 인해 기증·방치된 자전거를 수리 후 활용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이에 따라 2만대의 자전거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대전시는 궁여지책으로 이 제도를 유료로 전환한 뒤 자전거를 예산으로 구입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지방 지자체들이 시민들을 위해, 또 지역발전을 위해 벌이는 각종 행정행위가 선거관리위원회의 과도한 유권해석 탓에 발이 묶이고 있다.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112조(기부행위의 제한·금지) 조항을 너무 폭넓게 적용하는 것이다.

지자체들은 일단 애매하면 선관위에 사업계획서를 갖고 가 유권해석을 의뢰하는데 대개 선관위는 기부행위 범위를 폭넓게 해석하는 편이다. 이럴 때는 추후 시빗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지자체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발전 사업이 중단되면 지역주민 전체가 손해 보는 셈이 되기도 한다.

지역발전 사업들도 포기해야

동해안의 지자체들은 오래 전부터 매년 초 바닷가에서 해맞이 축제를 벌이고 새벽 찬 바람에 몸이 언 방문객들에게 떡국이나 군고구마 등 따뜻한 먹을거리도 나눠줘 왔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런 미풍양속도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에 해당된다고 유권해석했다. "방문객 중 선거구민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들 지자체들은 할 수 없이 마을단위 부녀회나 사회단체에 보조금을 주고 이 단체들이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축제 방문객들에게 제공하도록 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의 경우 해맞이 축제장 입구에서 경품권을 나눠주고 일출 후 추첨을 통해 경품을 주는 행사를 해왔는데 이것도 선거법 위반이라는 해석에 따라 2006년부터 중지했다.

서울의 한 구는 최근 음식점들을 대상으로 '반찬 재사용 않기' 캠페인을 벌이면서 공용 찬기를 음식점에 나눠주려 했으나, "모범음식점(전체의 5%)엔 나눠줘도 되지만 일반 음식점에 주면 기부행위가 된다"는 선관위 해석에 따라 난감해하고 있는 상태다.

임병헌 대구 남구청장은 "지난 봄 구청 축제인 대덕제에서 한 시민이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문안 가는 것도 선거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며 주의하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주민자치위원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병문안을 갔는데 음료수 하나도 사 들고 가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지자체장은 평범한 사회생활도 어려워

지자체장들은 과도한 선거법 유권해석 탓에 일반인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회생활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윤순영 대구 중구청장이 밝힌 최근 사례가 대표적이다.

"얼마 전 대구 봉산문화회관에서 서화전이 열렸어요. 서화를 하는 작가들이 작품을 내고 그 작품 팔아서 마련한 돈을 전액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행사였습니다. 저도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작품을 하나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거법상 기부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포기했어요. 결국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일을 할 수 없게 돼 속상했습니다. 이런 경우 중구청장의 이름도 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지자체장들은 초등학교 동요대회나 백일장에 가도 상장만 줄 수 있고 부상은 줄 수 없다. 어린이들은 선거권도 없는데도 그렇다. 진동규 대전 유성구청장은 "곧 졸업시즌인데 학교운영위원장상 등 다른 상은 상품이 푸짐하지만 구청장상은 연필 한 자루 없이 상장만 달랑 받으니까 다른 학생들이 구청장상을 받은 학생에게 '재수없는 놈'이라고 한다더라"며 한숨 쉬었다.

경조사비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자체장은 본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애경사에는 부조금을 줄 수 있지만 구청·사업소·동주민센터 등 본청 외 직원들에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

남상우 청주시장은 "초등학교 성적우수 졸업생들에게 상장을 주는데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도 줄 수 없다는 게 현행 선거법 유권해석"이라며 "돈 안 쓰는 선거풍토를 만들자는 취지는 좋지만 너무 경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식사 대접'도 지자체장들이 겪는 어려운 문제다. 현행 선거법 규정은 관내 유권자 또는 유권자가 아니더라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에게 식사대접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김재욱 충북 청원군수는 "공무원도 같은 청사 내에 근무하는 군청 직원에게만 밥을 사줄 수 있고 읍·면 직원은 안 된다"며 "결국 남에게 얻어만 먹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